[좋은 시를 찾아서] 시래기 삶는 저녁
[좋은 시를 찾아서] 시래기 삶는 저녁
  • 승인 2024.03.2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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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경 시인

그가, 평생을 널어 말린 시래기 한 단을 보내왔다

찬물에 풀어 담그니

바람과 햇살이 쏟아지고 허기가 부풀어 오른다

저녁 냄비에 된장과 멸치가 끓어오르면

부엌벽을 뚫고 나오던 누런 시래기

내 아이들은 시래기 맛을 모르고

버석거리던 그의 길도 궁금하지 않을 테지만

집안 가득 시래깃국을 끓이는 저녁은

늘 발이 시렸다

모처럼 만난 시래기 한 단으로

너무 멀리 갔던 앞마당의 신발짝들을 불러

늦은 저녁을 먹는다

멀리 있는 것들의 안부가 쏟아지고

빨랫줄 비는 날이 없던 앞마당도

잠시 쉬는지

텅 빈 밥상을 치우지 못한다

◇서미경= 2021년 <작가와 문학> 등단. 시집 ‘헛것이 헛것을 기다리는 풍경’이 있음.

<해설> 시래기를 보내온 그는 누구인가? 그것도 평생을 널어 말린 시래기라 하면 그는 평생 농촌에 거처를 두고 있는 그일 터, 시골에 사는 부모님은 아닐까. 아무튼 찬물에 풀어 담그는 걸로 보아 받는 그도 바람과 햇살이 스민 시래기를 잘 안다. 우러나오는 물빛을 보면서 맛까지도 예측한다. 하여 허기가 부풀어 오른다. 시의 전체 문장 중에 “늘 발이 시렸다” 생뚱맞아 보이는 이 문장은 이 시의 전체를 끌고 있는 어떤 암시인데 아마도 도회지에 사는 자식을 주려고 추운 날씨에도 서성거렸을 생산자 즉 부모님 마음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아직 어린 자식들은 그 맛을 모르고 너무 멀리 갔던 앞마당의 신발짝들을 불러 시래기로 만든 음식을 먹는 시인의 먼 안부까지를 듣고 있다고 표현한다. 아무튼 시래기를 시래기 아닌 안부 혹은 널린 시래기를 무게에 헐렁해진 줄까지도 시인의 안목은 가닿고 있다.

-박윤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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