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윤봉길의사 순국현장이 발견되었다
<대구논단>윤봉길의사 순국현장이 발견되었다
  • 승인 2011.05.05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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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객원 大記者

매헌 윤봉길의사에 대한 국민적 존경심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그 열기는 해가 갈수록 더해 가는 것 같다. 그것은 그의 애국적 거사가 너무나 빛났기 때문이다. 1932년이면 일제의 기승이 가장 자심했던 시절이다. 조선을 강제 병탄한 일제는 중국에 진출하여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과 함께 상해에 조계(租界)를 구축했다. 독일 등은 본국과의 거리가 멀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은 중국 각지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선(線)과 점(點)으로 이어지는 중국 장악에 나섰다.

아편전쟁에 의해서 영국에 패배하고,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무릎을 꿇은 큰 나라 중국은 덩치만 컸지 사실상 제국주의의 영토 확장정책에 야금야금 먹혀든 실정이었다. 중국은 각국이 임의로 설정한 조계에서는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비참한 처지였다. 내 나라 내 땅을 내주고 겉돌아야 하는 중국은 노쇠한 대국의 체면을 바로 세울 방법이 없었다. 이 때 터진 사건이 윤봉길에 의한 홍구공원(현재 노신공원) 폭탄 투척사건이다.

때마침 천장절(天長節)을 맞이한 일본영사관에서는 대대적인 기념식 준비에 바빴다. 상해에 거주하는 모든 일본인이 참석하게 되었고 육군대장 등 요인들이 단상을 차지했다. 삼엄한 경비가 펼쳐진 식장에 윤봉길은 미리 준비한 도시락 폭탄을 메고 일본인처럼 위장하여 장내에 들어갔다. 4월29일. 윤봉길의 손을 떠난 폭탄은 순식간에 단상의 요인들을 박살냈다. 만인이 주시하는 공개석상에서 일본을 응징한 것이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의 사진 한 장이 아사히신문에 크게 실렸다.

유가족들의 일부는 “윤의사가 맞다”고 증언하고 있으나 사진 속의 인물이 입고 있는 양복과 표정 등을 연구한 일부 학자들은 일본 헌병과 아사히신문이 조작한 사진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끌려가는 인물이 대사를 이룩한 거인의 표정이 아니고 비겁성을 띄었다는 것이다. 당당한 윤의사가 비겁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다. 이 문제는 전문기관에서 당시의 기록 등을 상세히 검토하여 두 번 다시 이론(異論)이 생기지 않도록 논쟁에 종결을 지어야 한다. 이런 난설(亂說)이 계속되는 것은 윤의사에 대한 불경이다.

아무튼 윤봉길은 일본으로 호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12월19일 오전 7시27분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시 미스코지(三小牛) 육군 작업장 내 서북 골짜기에서 총살형이 집행된다. “처형은 이미 각오했다. 할 말 없다”는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스물다섯 젊은 거인은 갔다. 그의 위대한 애국심을 길이길이 민족의 가슴 속에 심은 채 인근 노다야마(野田山) 공동묘지에 암매장되었다. 윤의사의 무덤을 감춘 것은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까 두려워서다.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한 미군의 수장도 똑같은 논리다.

1946년 광복 후 윤의사 유해봉환단(遺骸奉還團)은 효창공원으로 모셨다. 14년 만에 조국에 묻힌 것이다. 그러나 사형집행 장소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일본군이 남긴 현장사진이 한 장 남아 있다. 헌병, 총을 쏜 군인 두 사람, 윤의사의 모습도 보인다. 골짜기의 위치와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비친다. 처형관련 비밀기록인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는 처형장 도면의 방위와 사진에 비춰진 빛의 방향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순국현장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는 `근대사 다큐멘터리 전문PD 김광만`의 집념이 있어서 가능했다. 윤의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양승학, 재일(在日)윤의사 암장지보존위원회 회장 박현택, 부회장 김진수, 동아일보 기자 이광표 등이 현장을 함께 찾았다. 북위36도31분30.14초, 동경136도40분17.91초 현장의 정확한 위치다. 순국 79년 만이다. 윤의사는 처형 하루 전인 1932년12월18일 오사카(大阪)육군위수형무소에서 처형장 가까운 구금소로 이송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윤의사는 광복과 함께 찬란한 빛으로 부활했다.

농촌청년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독본(讀本)을 지어 농민야학을 열었던 그가 상해로 망명하여 위대한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뒤늦게나마 처형현장을 파악하게 된 기념사업회와 재일동포 등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이제 성역화를 서두를 때가 되었다”고 입을 모은다. 내년이면 윤봉길의사 순국80주년이다. 일본군에 의해서 암장되었던 처음 묘지와 처형 현장은 약3km 떨어져 있지만 이제는 두 곳을 연이은 성역화 작업이 더 긴요하다.

가나자와시를 방문하는 한국인이 매년 30만 정도로 많다. 이들에게 처형현장 등에 기념관을 세우고 애국 순례지로 조성한다면 역사를 깨우치는 체험이 될 것이며, 박해를 가했던 일본인들에게도 일제의 잔학상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지 않겠는가. 물론 일본 측의 협조를 구하는 일도 시급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진 수많은 애국자를 기념하고 그 업적을 기리는 일은 후손들의 의무다. 윤봉길의사의 애국단심을 기리는 특별전시회가 4월28일부터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것도 모두 살아있는 후손들의 삶에 큰 자양제가 되고 있음은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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