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정체성 국제포럼> 정신문화 뿌리찾아 세계와 소통
<경북정체성 국제포럼> 정신문화 뿌리찾아 세계와 소통
  • 대구신문
  • 승인 2011.06.1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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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 "신라의 개방.국제적 문화마인드 계승"
정순우 "가부장 요소 벗어나 보편적 문화 필요"
김희곤 "편가르기, 역사문화자원으로 해소"
경북도가 ‘경북 혼’으로 통칭되는 정체성 찾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세계화 시대 지방정부의 실체를 보다 분명히 해 브랜드가치를 높이고, 찬란한 전통문화와 정신적 유산을 되새김으로써 도민의 자긍심 고취와 결집력을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민선 5기 김관용 지사의 공약이기도 한 경북의 정체성 정립은 △신라의 화랑정신 △조선시대의 선비정신 △근대사에 나타난 선열들의 호국정신 △국가 근대화의 원동력이 된 새마을 정신 등 4가지 정신적 축이 그 핵심이다.

이에 경북도는 지난 3일부터 6일까지 한국 정신 문화의 수도인 경북 안동에서 ‘경북정체성 국제포럼’을 가졌다. 본지는 4대 정신적 축을 중심으로 포럼에서 발표된 전문가들의 경북정체성 확립을 위한 방안을 요약했다.(편집자주)

◆경북정신의 모델 ‘신라정신’(이정옥 위덕대 교수)

대구경북 지역민들은 ‘배타적’이란 외부 평가와 비판에 대체로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여기에 지역민들을 부정적 또는 악의적으로 표현하는 말인 ‘수구꼴통’이란 표현에도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
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스스로 자긍심을 가져도 모자랄 무한경쟁시대에 이런 의식은 비생산적·비효율적·비능률적으로 비춰질 수 밖에 없다. 원래부터 경상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배척·배타적이었을까. 2000년전 신라인들에게 물음을 던져봤다.

▲화랑의 ‘풍류도’=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신라 화랑은 자연을 찾아다니며 몸을 단련하고, 도덕
심을 기르고, 예술적 감성을 함양하며 몸과 마음을 수련케 한 소년집단이다. 지·덕·체·예를 겸비한 화랑의 바탕에는 전통적 사상에 유·불·선 3교를 융합한 생활 계율인 화랑도, 즉 ‘풍류도’가 있다.
풍류도는 충·효·믿음·용맹·자비로 나타나는 ‘세속오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런 화랑의 궁금점은 서양 중세시대 남성의 행동규범인 ‘기사도’나 일본 무사계층의 도덕윤리인 ‘무사도’와는 차원이 다른 나라사랑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와 역사의 강물을 도도히 흐르면서 관통하는 정신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21세기 새로운 인격의 완성을 화랑도에서 찾았으면 한다.

▲동서양 문물의 용광로, ‘코스모폴리탄’ 신라= 천년왕국 신라의 찬란하고 융성했던 문화적 저력은 외래의 다양한 문화와 문물을 과감히 수용하고, 포용해 내 것으로 만드는 개방성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황룡사지 동쪽에 인접하며 10년째 발굴이 진행중인 왕경지구 발굴현장에서 보여진 1500년전 서라벌(경주) 도시계획의 역사, 경주 대릉원 미추왕릉지구에서 출토된 유리 목걸이에서 드러나는 초원의 길(실크로드) 유리의 길로 소통한 신라의 모습, 경북 봉화군 몰야면의 취서사(현재 축서사)와 신라에서 일본 황실로 수출한 신라귀족 자초랑댁의 삼베 양탄자 등에서 세계적 신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신라인은 다문화주의자였다= 신라 노래인 향가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은 신라 최대 국제 무역항이었던 현재의 울산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때문에 설화에서 말하는 처용과 그의 아버지인 용왕의 실체를 두고,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견해가 서역에서 온 상인이란 것이다.

당시 세계 최대도시는 유럽의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 중국 장안, 신라 경주였다. 실크로드를 따라 활발한 교역을 이루면서 이 4개 도시에선 동시 패션시대가 열렸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는 해로를 통해 남방문화를 동시에 받아들여 독창적 문화를 형성했다. 서역인들의 눈에 당시 신라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각종 문헌 등에 따르면 아랍 페르시아인들은 신라를 이상향으로 표현했고, 신라에 서역인들이 영구 거주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아시아 대륙 중심부를 해로와 육로를 거쳐 일주하고, 아시아 대륙 서쪽 끝인 유럽까지 다녀와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한국 최초의 세계인 혜초 스님과 신라인의 이상세계를 보여주는 불국사, 황룡사, 안압지 등의 세계적 유산에서 ‘글로벌 신라’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를 다시 생각하다= 천년 역사를 통해 세습왕조가 아닌 박·석·김 3개 성이 고루 임금이 되고, 3명의 여왕을 뒀으며, 민주적 의사결정제도인 화백제도와 유·불·도 3교를 포용한 측면만 보더라도 신라인의 포용과 개방, 국제적 문화마인드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국경간 국경이 허물어지고 민족개념이 세계국가, 세계시민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이 시대, 신라 후예인 경상도와 경상도 지역민들은 마음과 문을 열고, 따뜻이 품고, 당당하게 소통하면서 천년을 이어온 신라, 그리고 서라벌에서 진정한 경상도의 DNA를 찾아야 할 것이다.

정리=강선일기자 ksi@idaegu.co.kr


◆선비정신과 경북인의 삶 (정순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역사속에서 선비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절의와 유교적 인격을 상징하나, 동시에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인물상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개화기 이후, ‘선비’라는 단어는 오랜 기간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해 왔다. ‘선비’라는 개념은 근대 혹은 근대정신과 배치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제 ‘선비’와 ‘선비정신’은 새롭게 재해석되기를 요청받고 있다. 경북지역도 각자의 이기적 생존 전략을 정의로 주장하고 공적인 정의는 급격히 그 힘을 상실하고 있다.

대경지역은 사표가 될 만한 ‘큰 어른’과 ‘큰 스승’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사회의 차원에서는 ‘성공적인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입신주의만 출몰하며, 이것은 다시 ‘우리가 남이가!’라는 연고주의에 함몰되는 악순환을 보이고 있다. 이 사회를 함께 살아 갈 유기체로 이해하고, 각 개인의 도덕적 역할과 기능을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 속에서 찾고자 하는 전체론적 사유가 요청된다.

▲선비,그는 누구인가?

단재 신채호는 조선 시대 선비의 기원을 멀리 신라의 화랑, 또는 그 이전의 상고 시대의 무사에까지 연결한다. 그에따르면, 상고의 수두 교도의 일단을 ‘선배’혹은‘선비’라 일컫고, 이것을 이두자로 ‘仙人’혹은 ‘先人’이라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재의 가설은 상당 부분 학문적인
엄밀성이 결여된 것으로 평가된다. 선비라는 말의 어원은 한자어 ‘先輩’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경북의 선비들은 소수의 경우만을 제외하고, 퇴계학파의 일원이다. 그들은 퇴계학단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표시하고 강한 일체감을 느낀다.

우리는 퇴계학맥을 남인과 서인의 관련 인물들을 망라하여 작성한 강주진의 계보도나 이가원의 연원도를 탈당색적인 입장에서,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객관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성이 있다. 이 말은 경북의 선비상은 타 지역의 선비상을 배타적으로 거부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폐쇄성을 극복하고, 타 학파나 타 지역의 개별성까지도 포괄하는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형태의 이념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경북지역의 선비문화와 가부장제 사회

아직 경북지역에 남아 있는 유교문화는 아직도 강한 가부장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 유학에서 규정되는 남성성은 지배적이고 능동적이며 권위적인 모형에 가깝다.

반면 여성성은 순종적이며 수동적인 역할모형에 가깝다. 그 이유로는 몇 가지의 유학적 원리들이 거론된다. 유교문화가 강한 영향력을 지닌 농촌지역은 지역적 폐쇄성으로 인해 그 고착의 정도가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된다.

종래의 선비문화는 촌락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선비들은 촌락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마을의 취락구성이 형성하는 이러한 독특한 권위구조를 내면화 하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둘러싼 삶의 환경화 형식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남성 중심의 선비문화가 자리할 공간은 없다. 종법제 사회와 가부장제적 사회 형태에서 비롯된 지나간 시대의 선비문화는 극복되어야 한다.

▲향후 사업 및 과제

우선 성행되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이 선비 정신인가에 대한 학문적 검토 작업을 수행하여, 지역공동체 성원들로 하여금 선비정신에 대한 자기 정체성을 공유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먼저 선비정신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창출돼야 할 것이다. 과거형의 ‘선비정신’을 어떻게 새로운 세대들에게 유의미한 미래형 문화상징으로 자리 잡게 할 것인가는 매우 신중한 재해석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가부장적 성격의 선비문화는 극복 지양되어야 하리라 본다. 또한 선비정신을 단순히 사상사적 입장에서 다루는 것을 벗어나 그것의 미학적 차원, 심리학적 차원, 심지어는 몸의 문제를 다루는 의학적 차원 등으로 그 외연의 범위를 확대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함께 선비에 대한 시민사회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각종 교양 총서류 발간, 에니메이션이나 영화사업과의 연결, 불교의 ‘템플 스테이’에 걸 맞는 ‘서원스테이’. 선비 로드등의 대중적 사업도 조심스럽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리= 김연진 기자 yeonjin@idaegu.co.kr

◆근·현대 경북인의 호국정신 (김희곤·안동대학교수,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한국의 근현대사는 밖으로는 독립해야하고 안으로는 근대사회를 건설하는 길을 찾아야했다. 그 때 바로 경북은 6·25전쟁에서 낙동강 방어전을 통해 한국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희생을 바탕으로 나라를 지키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경북인들의 정신과 역할을 통시대적으로 규명할 필요가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한 해 전 이미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공하고 장악하여 멋대로 한국의 제도개혁을 요구한 갑오변란의 항거로 1894년 갑오년에 안동에서 갑오의병이 먼저 일어났다. 이는 한국독립 발상지가 경상북도라는 의미이다. 북서부로 이강년이 문경·상주에서, 북부지역에서 권세연·김흥락·김도화 등이 안동·예안·예천·봉화·영주·의성·청송·영양에서, 동해안의 신돌석이 영해·영덕에서, 남동부의 정환직·정용기·최세윤이 영천·경주·포항에서, 서부지역으로 허위가 김천·선산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의병활동 뿐 아니라 근대교육을 위한 계몽운동·신식교육이 대구와 그 주변지역에서 일찍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영남출신 인사들이 ‘교남교육회’를 결성하고, 신교육을 도입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교남학교나 청도 문명학교·안동 협동학교 같은 근대교육기관이 문을 열었다.

경북에는 1913년 풍기에서 채기중이 조직한 광복단과, 1915년 대구 안일암에서 활동하던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되 독립운동의 상징적 단체인광복회가 있다.전자는 의병계열의 인물들이, 후자는 계몽운동계열 인사들이 조직했다. 광복회의 투쟁방향은 만주에 세워진 독립군기지를 확충하고 유지하기 위해 자금을 확보하고, 의열투쟁을 벌인다는 것이다. 박상진이 총사령을, 이진룡을 이어 김좌진이 부사령을 맡으면서 영남지역의 조직에서 전국을 망라한 조직으로 확산되었다.

이 밖에도 3·1 독립운동이 대구 서문시장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독립자금은 대구·경북지역에 모아졌다. 의열단 김시현·김지섭·이종암등의 대표적인 의열투쟁사들은 경북출신들이다.민족해방을 위한 아나키스트 투쟁가들도 안동의 류림과 영양의 엄순봉이 활약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대구 사범학교 학생들이 백의단·문예부·연구회·다혁당으로 항쟁을, 대구 상업학교 태극단·안동 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이 의열투쟁을 벌였다. 항일 문학으로 1940넌대 친일 시류에 휩쓸리지않고 민족의 양심을 지킨 상화와 육사와 같은 인물로 경북에서 민족문학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경북인의 호국정신을 말할때, 낙동강 방어전을 빼 놓을 수 없다. 6·25 전쟁 중 최남단 전선이 영천과 경주를 잇는 임포와 건천사이 고갯길로,낙동강 방어선으로 경북인들은 자유민주주의세계를 지켜냈다. 낙동강 방어선은 왜관에서 포항까지 이르는 것으로, 인천상륙작전 하루 앞서 영덕에서는 장사상륙전투가 펼쳐졌다.

낙동강 방어전은 너무나 치열했다. 왜관-다부동 지역에서는 11개의 전투가, 군위-신녕-영천 지역에서 10개 전투가, 기계-안강 지역에서 4개 전투가, 영덕-포항지역에서 8개 전투가 벌어졌다.

이들 방어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대 전환점을 맞고, 공산주의 체제적 위협과 침략을 성공적으로 저지한 세계사적인 업적이 되는 의미를 가진다. 경북인들의 희생으로 밀리기만하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과 호국정신이 총체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낙동강 방어전이다.

전통성과 혁신성, 그리고 통합성은 경북인들이 가지는 우수성이다. 전통과 혁신성이 충돌하기보다는 분화한 디에 다시 통합을 추구하는 그 선두에 경북인이 있다. 극도로 분열된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역사문화자원의 활용성을 높여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가 안고있는 편가르기 문제에는 이기주의와 권력욕이 핵심으로 작용하고 있다.

4대강 사업·쇠고기파동 등의 사안들은 모두 찬·반으로만 나뉜다. 이를 극복할 방법으로 역사문화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선택을 경북인들 가슴에 담기게 해야한다. 역사는 마치 공기와 같아서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분명 존재한다. 공기에서 산소를 뽑아 통에 담으면 자원이 된다. 역사문화로 자원을 재창출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정리=김현주기자 khj88@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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