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간난(艱難)과 고향
<대구논단>간난(艱難)과 고향
  • 승인 2011.08.0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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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민 건(대구대 영어교육과 교수)

오늘 하루도 그 무수한 시간들이 작렬하는 햇빛 조각 꽃처럼 떨어지고 한낮 증오도 여유로운 오후, 창밖의 매미소리들이 귀청처럼 늘어나고 다시 시간은 늙은 저녁으로 들어간다. 햇빛을 삼키는 여름날 저녁 얼마 전 시간을 내어 찾아 들어갔던 고향을 소슬한 가을의 바람처럼 지켜본다.

고향이라는 것이 대개 내려가면 `아 그새 많이도 변했구나’ 라고들 한다. 유년 시절 어려웠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품처럼 느껴지던 그 기억만으로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불편해지는 시대가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내려가는 고향에 대한 일종의 철없는 그리움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지형도가 아주 낯설어져 버린 그곳에서, 오히려 이방인의 시선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고향은 시시각각 계절의 단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또 맞이하지만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던 그래서 소꿉동무 같은 그 시절의 나무들과 `?지’(좁은 골목길을 의미하는 고향말)과 담장들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나는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 돌아보지 못했던 나 자신의 가난이라는 것을 보았다. 더불어 고향에 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 허망한 가난의 마음들도 보았다. 가난이라는 말의 어원이 `간난(艱難)’ 이라고들 하지만, 그 말의 풍기는 의미는 한참이나 다른 것 같다. 이를테면 간난은 가난의 원액과 같아서 그냥 한번 맛 볼 수 있어도 두고두고 마실 수는 없다.

그에 반해 가난은 아주 견딜 수 없는 것은 아니어서, 조금 나앗다가 또 도졌다가 하는 병처럼 그럭저럭 보낼 만은 하고, 그러는 사이 밥도 먹고 친구도 만나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깨고 나면 씁쓸하기만 한 꿈을 꾸는 그런 날들을 생각하게 한다.

예컨대, 나무가 벽에 갇혀 자라지 못하는 `곤(困)’이라는 글자가 간난의 상황이라면 가난은 사방의 벽이 조금씩 서로 어긋나서 그저 발이라도 뻗고 숨을 돌릴 만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누구도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다.

가난은 한참 힘을 쏟은 다음 땀에 젖은 축축한 내의와 같아서, 훌훌 벗어버리거나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을 수도 없다. 철들 때부터 노망 할 때까지, 불행할 때뿐만 아니라 행복할 때 조차도 가난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나의 고향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지금 자본이 제공하는 편리 속에 고향인들의 가난을 묵도하였다. 지독히도 고통스러워 치유가 힘든 그 절름발이의 마음의 가난을 바라보고 있다.

짧은 여정 속에 고향에 머물면서 나의 마음의 가난은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잠시잠깐 오늘의 어려움들을 털어놓고 바닷가 향기가 가득한 어느 익명의 횟집에 모여 서로의 별명들을 기억하고 안부를 걱정하는 동안, 홍안이 되어 얼굴이 불콰해진 한 친구가 갑자기 화를 벌컥 낸다. 주변이 당황스러워지면서 그의 행동에 또 한 친구가 그의 목소리를 말리면서 일은 진정되기 시작했지만, 추측컨대 자신의 삶과 외지 방문객의 삶이 비교가 되면서 그의 속내가 불쾌해진 것 같다.

돈 안 되는 일을 죽어라 하고 있지만 `어쩌랴 본인들이 좋아서 하는 일인 것’을 위로하면서 그때 아마도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부르지 않는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게 지금 나의 가슴을 참 먹먹하게 한다.

살다보면, 시대의 격랑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된 심신으로 고향의 속절없는 일상들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진짜로 싸워 본 자만이 좌절할 수 있고 절망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게 아닐까. 그 소박하지만 화려했던 모임 속에서 사람들의 공허한 인사치레가 불편해진다.

고향친구들을 만나서 마음이 풍성해지는 `감정의 밥상’을 차리고 마주앉아 아무런 이해 관계없이 즐겁게 식사를 하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시대를 넘어가고 있는 듯하다. 어설픈 마음의 가난의 곡선을 고향을 등지고서야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 나는 비교적 어려운 점 없이 살아왔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생활습관 일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몸으로 풍요의 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일상의 생활과, 머리로만 가난해 지려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의 가난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가 있다.

“그 악몽의 현장, 가위눌림의 세월, 그게 그의 고향이었다. 그러니 고향은 한마디로 잊고 싶고 버리고 싶은 것의 전부였고 행복과 출세와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다.”(현기영 <해룡 이야기>)는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고향이란 일반적으로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기억과 연관 되어 있기에 회상할 때마다 항상 감미로운 향수를 일깨워 주는 법이지만, 오랫동안 고향을 등지고 난개발로 그 시절의 시선의 기억들이 자본으로 교환 되어버린 요즘, 나에게는 이제 고향이란 이방인이 잠시 머무는 불편한 곳이 되어 버렸다. 마음의 가난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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