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부지깽이로 쓴 편지, 사람(人)
<대구논단>부지깽이로 쓴 편지, 사람(人)
  • 승인 2011.09.2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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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대구중리초등학교 교장

나의 시골 동네에 또출 아제가 살고 있었다.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하여 또출 아제는 남의 집 머슴으로 일하며 새경을 받아서 식구가 오순도순 살았다. 외아들인 창래는 머리가 영리하여 고등학교는 시골에서 마치고 대학은 서울에서 공부했다.

또출 아제는 아들의 장래를 항상 걱정하였고, 자식의 후일을 생각하면서 부부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은 새경으로 아들의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였다. 어느 날 또출 아제는 아들 창래의 안부가 걱정이 되어 누런 시멘트 포대 종이를 구해서 검정이 붙어 있는 부지깽이로 `人人人人人’하고 편지를 썼다.

그리고 남은 시멘트 포대 종이의 조각을 가위로 오려서 편지 봉투를 만들었다. 주소는 서당에 가지고 가서 붓으로 적어 달라고 하여 서울에 있는 아들 창래에게 부쳤다. 또출 아제는 자식에게 편지를 썼다는 자부심에 매일 같이 흐뭇한 마음으로 머슴살이도 신나게 하였다.

며칠 후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서 편지의 답장을 받은 또출 아제는 신명이 났다. 옆집에 가서 편지를 읽어 달라고 하니, 아버지의 편지는 잘 받았으며 공부 열심히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창래는 방학 때면 고등고시 준비를 위하여 시골에 내려와서 공부를 하였다. 토담집 작은방에 밤낮이 구별되지 않도록 멍석을 방문과 광창에 치고는 용변 보는 시간도 아까워 요강도 방안에서 사용하며 지독하게 공부하였다.

가끔 밥을 먹기 위하여 바깥을 나올 때면 호롱불에 머리가 그슬었고, 얼굴은 씻지 않아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창래는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검사가 되었고, 서울의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게 되었다. 워낙 가난한 또출 아제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또출 아지매 혼자만 보냈다.

다음해 손자의 백일을 맞아 서울 자식 집에 가기 위하여 또출 아제는 검정고무신을 짚수세미로 닦고, 평소에 입던 옷을 빨고, 두루마기도 풀을 먹여 다듬이질하여 줄을 반듯하게 세웠다. 수수를 디딜방아에 빻아서 가루를 내어 수수부꾸미를 만들고, 찹쌀인절미와 절편을 만들어 삼베 보자기에 싸서 당일 새벽에 서울 가는 경기여객의 첫차를 타고 을지로 6가 버스종착지에 도착하였다.
아들의 집에 도착한 또출 아제는 으리으리한 기와집에서, 윗옷을 벗고 도끼를 들고 집안의 귀퉁이에 쌓인 장작을 패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창래의 집 마루엔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판사, 검사, 경찰서장, 여러 친구들이 모여서 왁자지껄하였다. 그 중에서 창래와 가장 가까운 판사 친구가 “저기 마당에서 장작을 패시는 어른은 누구신가?”하고 물었다. 창래는 새까만 얼굴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남루한 옷을 입은 자기의 아버지를 보니 순간적으로 창피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으음, 우리 집 하인이야.”이렇게 말을 하고 말았다. 또출 아제는 머리에 피가 거꾸로 솟구침을 느꼈다. `저 저 놈이 내가 얼마나 저를 애지중지 키웠는데…. 저런 말을….’

또출 아제는 부르르 떨리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대청마루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마루에 서서 “예, 저는 이집 하인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창래는 제가 낳았습니다. 창래 주인님! 하인은 물러갑니다.”하고는 가지고 갔던 수수부꾸미, 찹쌀인절미, 절편을 싸 가지고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백일잔치에 온 손님들은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쯧쯧!” 혀를 차면서 한 사람 두 사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모두 돌아가고 말았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창래는 뒤통수를 망치에 얻어맞은 듯이 정신이 아뜩하였다.

다음날 창래는 고향의 부모를 찾아 갔지만 또출 아제의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는 말로 끝내 만날 수가 없었다. 서울의 직장에 돌아온 창래는 친구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의 냉소와 손가락질에 사직서를 내고는 결국 다른 직장을 구하였다.

얼마 후 창래는 아버지가 보낸 부지깽이로 쓴 편지를 가지고 서당 선생님을 찾아가서 그 내용을 알게 되었다. `사람(人)이면 다 사람(人)인가 사람(人)다운 사람(人)이 참다운 사람(人)이지.’
죽을 때까지 자식과의 연을 끊은 또출 아제의 집터는 잡초가 무성하지만 아직도 시골구석에 보름달같이 온아우미(溫雅優美)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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