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영어와 혓바닥
<대구논단> 영어와 혓바닥
  • 승인 2011.10.0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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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민 건(대구대 영어교육과 교수)

아이의 공부 방 앞에 붙여진 영어로 쓰인 일과표, 거실 바닥에 방음을 위해 깔린 영어 낱말로 된 바닥 깔개, 책장에 가득한 영어 동화책들, 컴퓨터 앞에 진열된 영어 노래 시디들, 영어 글씨가 박혀 있는 아이들의 밥그릇들, 영어 그림일기장, 영어로 장식된 아이들의 옷들, 티브이 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자막 없는 외국영화들. 미국 가정의 풍경이 아니다. 얼마 전 방문한 한국의 조카가 사는 집 안 풍경이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조카는 자의든 타의든 아빠의 직장 때문에 프랑스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작년에 귀국하였다. 9살 난 이 아이의 일상은 편안해 보인다. 어느 또래의 아이들처럼 학교생활을 제외하고는 거의 학원에 학습권을 의존하지도 않는 편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연스레 익힌 프랑스어는 이제 한국에서 그리 유효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알아차린 탓으로 부모는 아이에게 영어 환경을 제공하기로 다짐한다.

요즘 한국의 영어교육 안 밖의 풍경은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언어는 그 나라의 문화를 반영한다,’ `남의 그릇에 나의 정신을 담아내야한다’는 경구들과는 무색하게 학원과 학교들은 부모들의 불안을 조장하여 무차별적인 `조기 영어 교육’을 종용하고 있다.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 안에서 영어의 문제는 비영어권 국가에서 산뜻한 해결책을 찾기 힘든 일종의 딜레마다.

개별적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식민지 독립을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경제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다면 이제 영어라는 언어가,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 선다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우리에게 영어가 불가피한 현실이자 불가결한 생존수단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언어의 순기능의 차원을 넘어서 `이식과 모방’이라는 문화 식민주의적 절대도구가 되어 버렸다.

문제는 영어가 가지는 언어적 상징성 이상의 것을 따져보는 이가 한국 사회에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의미의 구체성이 상실된 채 남발되고 있는 `국제화 혹은 세계화’의 표현이 이 사회 안에서 `미국화’의 완곡어법이라고 가정한다면, 영어교육 강화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중심부와 이를 견제하는 주변부 사이의 불균등한 권력관계는 오히려 강화되고 그것을 합리화 하는 방식은 점차 교묘하고 정교해지고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육을 거치는 동안 특히 영어는 선행학습의 최우선 도구가 되고 있으며, 사회의 암묵적인 조장과 부모들의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더해져 아이들은 각 과정마다 제도교육기관이 아닌 밤낮없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학원가로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학습의 동기 없이 떠밀러 가고 있다.

학교 교육기관은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에게 보내는 불신의 시선 속에 그저 친구를 만나거나 모자란 잠을 청하러 가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기성세대까지 영어는 영원히 극복이 되지 않는 스트레스와 강박관념의 동기가 되고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이 사회는 이들의 혓바닥을 조정하면서 영어를 통해 계급의식과 사회적 열등의식을 은연중에 공고히 하고 있다.

조카아이는 만날 때마다 아빠와 엄마를 의식한 탓인지 나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이곤 한다. `영어 공부 안하면 안돼요? 그런데 안할 수는 없죠? 내 짝꿍은 영어를 참 잘하거든요.’ 궁색한 답변을 찾던 내가 뻔 한 질문을 한다. `프랑스에 있을 때 프랑스어는 어떻게 배웠니?’ `지금은 많이 잊어버렸지만 너무 재미있었어요, 학교에서 숙제를 하라고 하지도 않았어요.

이제는 프랑스어 할 필요도 없어요.’ 이 아이는 이미 한국에서의 영어공부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듯 했다. 영어와 모국어에 대한 생각과 차이에 대한 고려 없이 학교와 집안에서의 무차별적인 미국적 환경에 대한 조성은 오히려 아이에게 영어라는 타문화의 언어에 대한 건강한 기능조차 빼앗아 가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영어는 매체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이미 물신이 되었다. 한글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유치원 아이들부터 정년을 앞둔 기업간부들에 이르기까지 영어는 개인의 능력과 적성을 가늠하는 보편적 잣대로 군림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를 결핍과 부재로 규정짓고 일상을 불안과 강박으로 짓누르는 영어야 말로 한국인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초월적 지표가 되었다.

또한 영어실력에 따라 인간다운 삶의 등급이 매겨지고 훌륭한 부모를 만나야 영어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어는 우리사회의 모순된 계급구조를 재생산하는 일종의 문화자본이다.”(송승철 `안과 밖’)라는 한 영문학자의 말을 곱씹어 보아야 할 `영어가 혓바닥을 지배하는 시대’를 넘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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