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날마다 만나는 한강 정구 선생
<대구논단>날마다 만나는 한강 정구 선생
  • 승인 2012.02.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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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후섭 대구광역시달성교육지원청 교육장

달성 사람들은 날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 걸었던 길을 걷고 선생이 살았던 집터에 또 새로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아버지를 따라 현풍에 살면서 외증조부인 한훤당(寒暄堂)의 학문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뒤에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서재 도여유, 양직당 도성유 등 달성 지역에서만 해도 70여 명의 제자를 길러낸 대학자이다.

또한 지금도 선생의 자취가 밴 도동서원(道東書院)과 그 마당에 직접 심은 우람한 은행나무가 우리를 반기고 있고, 선생의 제자가 속했던 우리 지방 9개 문중에서 선생을 추모하여 세운 이락서당(伊洛書堂)이 강창교 산비탈에 최근 중수되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선생이 말년을 보낸 사수동(泗水洞)은 최근 택지 개발이 이루어져 옛 흔적은 찾아볼 길 없으나, 선생이 거닐며 제자들과 더불어 학문을 토로하고 시를 읊었던 금호강(琴湖江)은 예나 지금이나 유장하다.

그리하여 우리 지역 사람들은 선생의 보이지 않는 품을 벗어날 수가 없다. 선생은 우선 학문을 깊이 익혔다. 영남학파의 양대 거두인 퇴계 선생과 남명 선생으로부터 각각 성리학을 공부하고 이른바 심학(心學)으로 불리는 선생만의 독특한 학문을 열었다. 선생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그 학문을 미수(眉?) 허목(許穆)에게 전하여 기호학파에게도 영향을 주어 마침내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으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거름 역할을 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그 범위가 너무도 넓어 성리학, 예학, 역사 전기, 지리, 의학, 문학 등 각 부문에 걸쳐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31세 때부터 후진교육과 저술에 힘써 방대한 양을 남겼으나 임진왜란과 여러 국내 어려운 사태를 겪는 과정에서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선생이 지금의 노곡동(櫓谷洞)에 잠시 거주할 때에 고향에 보관하고 있던 문적이 모두 물 탔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늘이 나를 장례하는 도다.” 하고 통탄했지만, 이미 72세의 노경에 이른 근력으로는 소실된 저술을 다시 편찬할 수 없어, 오직 몇 권만 다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저술들이 그대로 보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말 아쉽다.

둘째, 나아가고 물러섬이 분명하였다. 선생은 31세 때에 처음으로 벼슬을 받았다. 퇴계도 남명도 세상을 떠난 후였다. 선조(宣祖)가 “산야에 묻혀 있는 조행지사(操行之士)를 천거하라.”고 하자, 이에 선생과 동문수학한 친구인 동강(東岡) 김우옹(金宇?)이 수찬벼슬에 있으면서, “정구는 일찍이 이황을 좇아 배웠고, 조식 문하에 왕래를 해서 학문이 밝으니 불러서 사람됨을 알아보고 벼슬을 내리심이 어떨까 하옵니다.” 하고 선생을 천거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예빈시 참봉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선생은 벼슬을 받지 않았다. 아직은 학문을 더 닦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서로 벼슬을 하려고 줄을 대던 시대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 뒤, 건원릉 참봉과 의흥, 삼가, 지례 등 현감 벼슬이 여러 번 내려졌지만 모두 사양하다가, 38세 때 창녕현감으로 처음 취임하였다.

이때 상경해서 선조를 처음 만났는데, 선조는 선생의 학문과 인품에 매료되어 선생을 지극히 대접하였다. 그 뒤, 50세 때에 통천군수로 재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창의군을 모집하고 직접 의병을 인솔하여 전투에 참여하였다.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셋째, 자기 관리에 철저하였다. 예순이 지난 노경에도 종일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73세가 되던 해 중풍으로 오른쪽 반신이 불안하게 되었지만 독서와 저술을 놓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가례회통(家禮會通)’을 교열하다가 벽에 붙여놓은 글씨가 삐뚤어졌으니 바로잡게 했다고 한다.

만약 선생의 저술들이 지금도 남아있다면 더욱 크게 선생의 자취를 실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생의 향기는 현풍 읍내, 노곡동, 사수동, 구지의 도동서원 등에 은근하게 남아있다면, 이락서당과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 그리고 각 문중의 문집 등에는 더욱 진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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