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인간에 대한 예의
<대구논단>인간에 대한 예의
  • 승인 2012.02.19 13:5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민건(대구대 영어교육과 교수)

너무 높아서 아파트 위로 올라가지 못한 저녁노을이 콘크리트 벽 사이에 엉거주춤 걸려 있다. 도시의 수많은 유리창들 사이로 파편처럼 흩날리며 저녁 햇살이 말갛게 도드라져 보인다. 최근 이사를 하며 같이 사는 사람이 버리라고 잔소리했던 20년이 훨씬 넘은 조그만 라디오에서 낯익은 음악이 흘러나온다. 낯선 도시에서 자취를 하던 시절, 이 라디오는 나에게 세상과의 소통의 도구였다.

라디오를 품고 산 적이 있다. 디지털이란 표현이 생소했던 10대의 그 시절, 대부분 아이들이 그렇듯이 학교 안의 답답함과, 몸에서 반응하는 감각적인 모든 것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말들 속에 내 맡긴 적이 있다. 좋아하는 노래 가사를 꼼꼼하게 적어 그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남모를 흥분에 젖어 노래를 따라 하곤 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조그만 트랜지스터는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자 소통이었다. 낡은 악기와 같이 오랜 세월에도 휘지 않고 오랜 술과 같이 묵은해를 더욱 달게 만드는 낡은 제목들의 음향과 그윽한 향기가 배어나는 낡은 라디오는 인간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제공해 주었다.

`근대’의 개념이 식상해지거나 잊혀져버린 오늘날, 다자적 근대를 비판하면서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넘어선 듯한 요즘의 사회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진보하였고, 근대에서 탈근대로 전이했지만 여전히 누구나 가난한 삶이 일상이었던 이전 시대의 소통과 따뜻함은 근대의 모든 부정적 요소와 함께 버린 듯하다. 대신 그 자리에는 몸을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통제 불능의 괴물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

가난한 밥상 대신 화려한 인스턴트 밥상이 식욕을 당기고 있고, 라디오는 스마트폰과 컴퓨터에 밀려 이제는 낯선 골동품이 되었고, 거리가 멀어진 친구에게서는 손 글씨로 쓰인 안부편지 대신에 영상통화와 휴대전화 메시지가 소식을 전하고 있다.

라디오에서 전하던 가사가 선명하게 들려오던 사연담긴 노래구절은 요란한 기계음이 섞인 디지털 음악이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있고, 선생과 학생 그리고 부모님들의 가르침과 소통은 각자에게 들이댄 숨은 발톱으로 폭력과 고소가 난무하고 있다. 빠르게 진보한 사회만큼이나 그 공간 안에 인간은 부재해 보인다. 이 부재함은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를 한참이나 벗어나 타자의 시선과 욕망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도 한다.

힘들수록 더 거세게 부딪치고 싶은 개인의 욕망은 집단의 이기에 밀리거나 아니면 타인의 고통쯤으로 취급해버리는 포스트 모던한 이 시대에 포스트 모던한 곳은 없어 보인다. 다양성과 개성의 시대를 넘어서고 있다고 하지만 개인의 다양성과 개성은 모방에 머물러 있다. 최소한의 과거 시대의 아픔과 따스함에 대한 반성과 연민은 없다.

최근 경찰이 학교폭력 근절에 개입하면서 학교폭력이 조폭 수준의 폭력으로 비화되고 있다고 하지만, 학교 구성원들의 정신적 폭력은 나아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을 사이에 두고 부모님들의 고소고발 사건도 그렇거니와, 부모님들이 교사를 고발하는 일도 교실 안 학생들의 도발을 막을 수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진보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편리함을 제외하고는 사회 안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는 없다.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는 공동체 삶의 최소요건인 인간에 대한 예의와 소통을 자본으로 대신하고 있고, 타인의 상처는 오롯이 그들만의 문제 일 뿐이다. 얼마 전 신문을 통해 접한 한 사연이 가슴을 쓰리게 한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노는데 그것을 제지 안했다는 이유로 아파트 주민이 경비원에게 물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다. 아파트 주민 앞에서 약자 일 수밖에 없는 그는 결국 병원 치료를 받고 나왔지만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 결국 죽음을 택했다.

아파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경비원들은 단지 청소나 택배 보관, 재활용품 분리수거, 화단관리, 주차관리, 음식물쓰레기 처리 등 잡무를 도맡고 있다. 아파트 경비들은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제기되면 해고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근로조건에 관한 불만사항이 있어도 하소연할 데가 없는 실정이다.

“주민께 용서를 빕니다. 아무 잘못 없이 폭력을 당하고 보니 머리가 아파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나에게 경비가 뭐 하는 경비냐는 말과 폭력을 당하고 보니 내가 왜 그런 폭력을 당해야만 하는지 머리가 돌 지경입니다. 언어폭력과 폭행을 당해본 본인은 어디 가서 하소연합니까. 주민 여러분, 내 잘못이 있다면 나를 용서하시고 아파트 경비가 언어폭력과 폭행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그가 죽기 전 남긴 유서에서, 약자에게 생각 없이 가한 인간의 폭력은 처벌이 아니라 잔인한 살인의 도구임을 반증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한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