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투명 인간
<대구논단> 투명 인간
  • 승인 2012.03.0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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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민 건(대구대 영어교육과 교수)

남도의 봄은 섬진강으로부터 올라온다고 한다. 강 끝자락인 하동포구에는 봄을 알리는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고 한다. 봄의 시작인 삼월에 동장군이 봄의 진군을 뒷걸음치게도 할 법한데 샛노란 산수유도 한 몫 가세를 한다. 지난겨울이 혹독하고 쓸쓸했다고는 하지만 밀려오는 봄의 꽃향기가 지나간 계절의 혹독함을 부드러운 숨결 속에 묻는다.

자연이 앙상한 가지에서 혹은 얼어붙은 거친 땅 밑에서 순환을 지키며 생명과 꽃봉오리를 다시 피워내는 동안, 이 사회는 자연의 순환관계를 거스르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인간의 위대함을 이야기 하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모든 인간의 가치들이 심장이 없는 것처럼, 마음 자체가 없는 것처럼, 타인을 향한 어떤 공감이나 연민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정치인들의 부도덕성도 마찬가지이지만, 힘없는 친구를 왕따 시키고 상습 구타하는 학생, 익명이라는 무기로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들을 향해 부지런히 악성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 자식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부모들, 자신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타인의 소중한 인권과 자유를 짓누르는 개별 집단들은 일종의 왜곡된 욕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자신들의 결여를 챙기기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있다.

문제는 이 사회 분위기가 이러한 정신적 물적 폭력을 방치하거나 자신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기형적 사회 구조는 적지 않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과 죄책감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 상황 하에서, `착한자로 살아남기,’ `천사되기,’ `이타적 행동하기’ 같은 말 등은 어쩌면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한 경쟁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약자들의 자기 합리화처럼 보인다.
최근 신문에서 접한 한 지방대 졸업 학생의 사연이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졸업 뒤 취업과 학업 두 가지 길을 고민하다가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이 학생은 서울에 있는 모 명문 대학원을 입학한다. 그러나 이 학생은 모교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신적인 폭력을 당한다.

교수들과 동기 대학원생들로부터 출신이 다르다고 은근한 따돌림을 당하는가 하면, 교수 연구실마다 배정받는 조교 역시 배정받지 못하고 이듬해 본교 출신의 후배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본교출신 동교들은 학과 행사 일정에 대해 알려주지도 않은 채 학과 모임에서 그를 배제하기도 한다. 결국 이 학생은 2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결심한다.

“투명 인간 상태가 오래 지속되자 모든 의욕이 떨어졌다. 공부도 하기 싫었다. 지도교수에게 찾아가 사정을 말했더니 “어른이 뭘 그런 걸로 그래. 누가 챙겨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해야지”라며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게 다였다. 한번은 구내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 대학원 동기가 앉아 있었다.

내가 있는 줄 모르는 그 녀석은 “걔, 지방대 나와서 취업 안 되니깐 학력 세탁하러 온 거 아냐?”라는 말을 했다. 내 귀에 정확히 박혔다. 주변에 있던 한 녀석은 “그래도 취업 안 될걸”이라며 실실 웃었다. 속이 뒤집어졌다. “난 들킬까봐 조심스럽게 자리에 일어났다“ 는 이 학생의 발언이 보이지 않게 행사하는 집단적 폭력과 이기주의를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 사회는 이러한 부조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는 문을 향해 끊임없이 문을 두드려 보지만 이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상처뿐이다. 평범한 일상적 소통관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허위의식은 상대에게 적대감과 모욕감을 동시에 드러낸다.

어떤 이에게 삶의 긍정은 또 어떤 이에게는 냉담한 현실과 삶의 절박한 위기의식을 낳기도 한다. 개인의 삶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존의 현실에서 낙오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자연이 생선가시처럼 앙상한 가지에서 새 생명을 피워내는 동안, 이 사회 안에서 조성되고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중략)/ 물방울들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들어선 안 된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기형도 `정거장에서의 충고’) 인간의 비극적 세계관을 토로했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강한 이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주체적 삶을 감시당하는 약한 자들의 몸과 시선은 겨울 꽃이 지고 봄꽃 찬란해질 이 봄날의 시작에 여전히 춥고 비루한 길을 가고 있다. 사람들이 봄날의 기운에 취해 들썩이는 동안, 옆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투명 인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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