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지 않은 자기 말
물들지 않은 자기 말
  • 승인 2012.12.05 12:5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현 대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 내외는 어린 아들 둘을 다 낯선 사람의 손으로 키워야 했다. 아내는 지금도 틈만 나면 경제적으로 여유 없는 남편을 만나 같이 일을 하느라 아들을 직접 키우지 못한 것을 한탄한다.

그 때, 큰 아이를 맡아 키우던 아주머니는 아주 침착하고 차분하며 책을 많이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듣는 그런 분이었다.

그 분은 아들과 조용한 시간을 함께 보냈고 바깥에 산책을 할 때에는 유모차에 예쁘게 수놓은 햇빛 가리개를 아늑하게 씌워서 그렇게 데리고 다녔다. 아들은 뽀얗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며 평안하게 자랐다.

둘째를 키우던 분은 밝고 활동적이었다. 트롯과 같은 대중가요를 즐기고 동네 분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분이었다. 이 분은 아들을 항상 동네에 데리고 나와서 어른, 아이들과 어울리게 했고 유모차에 태우기보다는 업고 안고 하면서 다녔다. 아들은 잘 웃고 잘 놀며 행복하게 자랐다.

그 분들의 영향이었던지 큰 아이는 자라면서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였고 말하는 것을 책 읽는 것처럼 하는 버릇이 있었다. 내신이나 수능같이 규격화된 시험보다는 면접이나 논술같이 융통성 있는 시험에 자신있어하여 지금은 대입 수시모집에 응시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둘째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가족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어떨 때는 둘째의 말발에 끌려 밤늦도록 가족들이 웃으며 얘기를 나눌 때가 있다. 학교 성적은 말하기 민망할 정도이지만 친구들을 배려하고 재미있는 얘기를 잘 해서 제법 인기가 있는 듯하다.

큰 아이가 대여섯 살 때쯤의 일이다. 아이는 ‘날개 달기’라는 책으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작은 아이도 그 책으로 공부를 했는데 이 책에 있는 스티커가 예쁘게 만들어져 있어서 큰 아이는 작은 아이의 공책과 스티커를 자꾸 빼앗아 놀았다. 그 때문에 둘이 자주 싸우기에, “야, 너는 그것을 먼저 다 끝냈잖아? 동생 좀 배우게 놔둬” 라고 했더니 큰 아이의 대답이 “아빠, 근데 왜 내게는 아직 날개가 달리지 않았지?”라고 한다.

날개 달기를 끝냈으면 날개가 달려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그 대답에 황당했던 기억이 있다.

그 무렵 작은 아이는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엄마에게 졸랐다. 엄마가 “고양이는 응아도 하고 털도 빠지고 하니 키우기가 어려워요”라고 하였더니 아이는 “응아는 내가 치우고요, 털도 빠진 것은 내가 다시 꽂아줄게요”라고 한다.

살아있는 고양이가 무슨 조립장난감인 양, 털 빠진 것을 다시 고양이에게 꽂아주겠다는 대답에 우리 부부는 한참을 웃었다.

사실 어린 아이는 그 자체가 호기심 덩어리다. 대부분 아이는 기어 다니다가 때가 되면 서서 걷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는 세상에서 서고 걷는 인간을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듯이 아이는 너무도 뻔하고 당연한 사물과 현상을 끝도 없이 “이게 뭐야?”, “저건 왜 그렇지?”라며 묻는다.

부모는 답을 해 주고 싶지만 때로는 질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때로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난감해서 “그냥 그런 거야”, “원래부터 그래” 정도로 답해 버리고 만다. 때때로 아이가 기상천외한 답을 스스로 해서 다행스러울 때도 있다.

이제 중학교, 고등학교의 고학년이 된 두 아들은 이런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은 말, 어떤 책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말, 생명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그 안에서 저절로 나오는 이런 말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린 시절에만 한다.

그 짧은 시기가 지나면 아이들은 이제 학교에서 배운 말, 부모님이 기대하는 말, 어른이 예측할 수 있거나 기대하고 있는 말을 한다. 학교와 가정과 사회 곳곳에서는 웬만한 질문은 바로 신경 끄게 할 수 있는 정해진 답과 ‘설명 체계’가 준비되어 있다. 이 설명 체계에 적응하고 익숙해져서 자동화, 습관화된 답을 해 낼 수 있어야 일상생활이 쉬워진다.

이제 얘들이 더 자라서 나처럼 어른이 되면 신문에 나온 말, 텔레비전에서 방송 된 말, 이미 책에 다 써져 있는 말을 자기의 생각에서 나온 말인 것처럼 열을 올려 말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공부를 많이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어디에 물들지 않은 말,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아이들이 컸으면 좋겠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