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우리 시대 전태일
<대구논단> 우리 시대 전태일
  • 승인 2010.11.1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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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흥(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얼마 전부터 청계천8가에 있는 다리 하나를 두고 명칭을 변경하자는 1인 시위가 진행되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이 다리의 명칭 변경을 요구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 주장은 청계천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를 `전태일 다리’로 변경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서울시는 `버들다리’와 `전태일 다리’를 같이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된다면 `전태일 다리’는 개인 이름을 교량 명칭으로 붙인 서울시의 첫 사례가 된다. 전국적으로 교량명칭이 개인 이름으로 제정된 사례는 2012년 준공 예정인 `이순신대교(전남여수~광양)’가 있다. 버들다리 명칭은 다리 주변에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던 것에서 이름 지어진 것이다.

전태일(全泰壹)은 누구인가? 그는 지금부터 4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스물두 살의 나이에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마라’를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사른 인물이다. 우리나라 노동 인권운동에서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그는 1948년 8월 26일 대구(당시 대구부 남산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고등공민학교 1년 정도밖에 다니지 못하고, 17세의 나이에 평화시장의 의류제조 노동자가 되었다. 평화시장에서 나이 어린 봉제공들이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다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되는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아 여공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이후 재단사로 다시 취직하였으나 하루 15시간의 중노동은 계속되었다.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해설서를 구입해 공부하다가 최소한의 근로 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에 분노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조합인 `바보회’를 조직하여 평화시장의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 노동청과 서울특별시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나 노동자들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 뒤 22세가 되던 해에 평화시장의 노동실태를 다시 조사하여, `노동시간 단축, 주휴제 실시, 다락방 철폐, 환풍기 설치, 임금인상, 건강진단 실시’ 등의 요구조건을 노동청에 제출했다.

그러나 노동조건 개선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11월 13일 “일주일에 한번만이라도 햇빛을 보게 해 달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려다가 경찰의 제지로 해산당하게 되자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전태일의 분신은 산업화가 가져온 거대한 물결 속에서 낯선 도시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처절한 생존이었다. `인간다운 노동의 권리’에 대한 외침은 생전에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사후 세상을 뒤흔들었다.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와 김대중은 `노동환경 개선`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우리 시대 전태일은 어떠한가? 이와 관련하여 최근 주목받고 있는 책이 하종강 등의 `너는 나다-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 철수와 영희 등, 2010년 11월 13일 출간’이다. 이 책은 영리를 추구하는 출판사들이 공익을 목적으로 처음 만든 책이다. 등장인물은 40년 전 전태일과 같은 또래 혹은 성과 이름이 같거나, 이름만 같은 사람들로 오늘날 노동 현장을 대변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5명의 전태일 중 4명은 대학생으로 그 중 3명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보충하고 있다. 그 중에는 학비를 대지 못해 휴학을 고민하거나 중퇴를 택한 경우도 있다. 이들은 벌써 10대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을 가지고 있다. 40대인 전태일은 유통업체의 사장이지만 더 많은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

그는 편의점 운영시에는 점포 수익이 올라가자 건물주가 편의점 운영권을 강탈했으며, 우유대리점을 운영할 때는 본사 관리인에게 거액의 상납을 요구받았으며, 유통업을 하면서는 도매업자에게 받은 수표가 부도나기 일쑤였다. 결국 오늘날 역시 노동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전태일이 몸을 불사르며 준수하라고 외쳤던 근로기준법은 1953년 6·25전쟁 중 부산에서 북한이 `노동법’을 만들자 이승만이 일본의 노동법을 베껴 만든 것이다. 하종강은 “1953년에 만들어진 노동법이 지금보다 더 좋은 법이었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공무원·교사 노조를 인정하고, 노동조합의 정치 활동 금지 조항도 없다. 우리는 그가 40년 전에 외쳤던 소리를 기억하자. 많은 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비정규직·서민은 여전히 고통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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