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가을밤에 든 생각
[달구벌아침] 가을밤에 든 생각
  • 승인 2023.09.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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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보고픈 그대 생각 짙어져 가는 시월의 아름다운 이 밤에, 부르다 보면 어제가 올까요. 그립던 날이 참 많았는데…." 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이란 노래를 들으며 어둠이 쌓인 막다른 골목 안으로 접어든다. 짧은 소매와 바짓가랑이 사이로 드러난 살갗에 서늘함이 느껴진다. 어느새 가을 속이다.

늦은 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으려던 순간, 어디선가 찌갠지 라면 끓이는 냄새가 창을 타고 넘어온다. 문득 '무슨 이유로 이렇게 늦은 식사를 할까.'하는 궁금증이 인다. 뒤이어 '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와 이제야 한술 뜨나 보다.'로 생각이 이어진다.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가장이나 힘겹게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온 학생을 나도 모르게 떠올려 본다. 어쩌면 그러한 생각들은 타인을 향해 갖고 있는 내 마음의 기본값이 연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의 경험이 더해진.

밤이 깊으면 나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지는 듯하다. 특히 가을밤이면 그런 생각들이 더 깊어진다. 하루를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걸, 이 지구별에서 발붙이고 사는 게 그리 쉬운 것만이 아님을 알기에. 나 자신을 위한 일이든 세상을 위한 일이든 또는 나라를 위한 일이든 서로 고생하고 함께한 사람들끼리 다정한 텔레파시를 보내면서 하루를 마감하며 잠들기 전 드리는 기도처럼 온기를 더해보는 의식 같은 것이다.

남을 연민하는 마음이 곧 나를 연민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타인의 힘듦까지 더 잘 느껴지기 마련이다. '애썼다'라든가 '고생했다'라는 말을 가을 밤 별빛 속으로 텔레파시를 쏘아 보내면 또 그들이 쏘아 보낸 텔레파시를 나 또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삶은 어떤 것을 이루어 나가는 일이며 죽음은 그 이루어 나감의 완성이다'라고 했던가. 삶이란 결국 죽음의 예행연습이 아닐까. '오늘보다 내일은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겠지'라는 삶의 희망을 쌓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삶의 예행연습을 통해 죽음이라는 정상에 이르는지도.

살아가는 일이 산을 타는 일만 같다. 높거나 낮거나 깊거나 얕은 무수한 삶의 굴곡들을 경험하게 된다. 때론 가거나 서거나 오르거나 내려오거나 잠시 멈춰 서서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가끔, 아주 가끔은 산 아래 서서 올라갈까 말까 망설일 때가 있다. 그렇게 망설이며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중턱에 이른다. 그땐 올라갈 수도 내려설 수도 없는 지점에 다다른다. 그럴 땐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올라가는 편이 더 낫다'라며 내려가는 것보다는 정상에 오르는 편을 택하게 된다.

계절이 그렇듯 살다 보면 살아지는 일처럼. 정상까지 올라가지 못한다 한들 어쩌랴. 여행의 끝이 종점인 동시에 돌아오는 길이듯 원점인 집이 다시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내가 돌아가야 할 집은 집(House)이 아닌 집(Home)이었음을. 어떻게 사는지가 아니라 어떤 것들로 채우고 사느냐가 더 중요한 삶의 목표다. 날마다 빛나고 찬란하지 않아도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감동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래본다.

껴안을수록 더 멀어지고 터지는 세상인 듯, 계절은 종횡무진 앞만 보고 달려간다.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 정신없이 살아온 건 아닌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되는 여름 지나 가을이다. 잠시 멈추고 서서 발갛게 익어가는 홍시를 떠 올려다보며 까치밥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밤새 한숨 쉬느라 쉬이 깊은 잠에 들 수 없는 불면의 밤들, 한밤중에 깨어나 앉아 이미 몇 번이나 읽은 '아침의 피아노'를 펼쳐 든다. 미학자이며 철학자인 고 김진명 선생의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으로 암 선고 이후 몸과 마음을 쏟아부은 정직한 기록이다.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13개월 동안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썼던 234편의 애도 일기가 담겨 있다.

"보리수, 아침 차 안에서 슈베르트를 듣는다. 성문 앞 보리수를 찾아가듯 그날 이후 텅 빈 채 흘러간 한 달의 날들을 돌아본다. 뭔가 부글거리는 것들이 그 안에 있다. 나는 살고 싶은 것이다. 일하고 싶은 것이다. already but not yet(이미, 그러나 아직)/ 슬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슬픔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니다./ 아침 베란다에서 거리를 내다본다. 파란색 희망버스가 지나간다. 저 파란 버스는 오늘도 하루 종일 정거장마다 도착하고 떠나고 또 도착할 것이다./ "얼마나 걸어가야 절이 나오나요?"라고 물으면 촌부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자 뿌리고 그냥 가소. 그라면 나오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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