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선인들은 우순풍조로 가뭄·홍수 없는 풍년 기원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선인들은 우순풍조로 가뭄·홍수 없는 풍년 기원
  • 윤부섭
  • 승인 2023.10.1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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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금호 거북이가 팔공산이 그리워 기어오른다
산을 등진 거북이·바위를 등진 가재
금호강변 마을, 속담따라 명칭 정해
경산시 진량읍에 거북바위·구연정
조야동 뒷산 함지산 자락에 자라봉
금호강거북이
금호강변에서 거북이 유래 지형지물을 많이 볼 수 있다.

◇금호세심정(琴湖洗心亭)에서 마음 씻기(mind washing, 洗心)를

동화천 섶 동변동 유니버시아드 선수촌 아파트에서 가람봉 들머리에는 “마을을 씻어주는 정자(洗心亭)”가 자리 잡았던 옛터가 있다. 세심(洗心) 전응창(全應昌) 선생이 세운정자라 그의 호를 따서 세심정(洗心亭)이라고 했다. 세심 선생의 형,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은 대구 최초서원인 연경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농암 이현보 선생의 아들 이숙량(李叔樑)과 영남유림의 쌍두마차였다. 연경서원을 들락거렸던 영남유림들과 금호강 선유와 세심정 풍류를 즐겼다. 세심을 통해 요산요수지락을 담을 마음의 그릇을 마련하고 담겨있던 걸 몽땅 비웠다. 그래서 그런지, 인근 ‘꽃 소(花潭)’,‘꽃 그림 벽(畵壁)’ 그리고 학봉(鶴峯, 가람봉)의 풍광에도 조그마한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이태백이 지었던 ‘인생 살기 어렵다(行路難)’에서 “귀 있다고 (더러운 걸 다 듣고) 영천 물로 귀를 씻지 말라요. 입 있다고 수양산 고사리 뜯어 먹지 말 것이지. 빛을 숨기고 세상과 뒤섞여 무명(無名)을 귀히 여길지라. 어찌해 고고함을 구름과 달에 비교하는가?”라고 마음을 비우고 밑바닥까지 싹 씻어버린다. 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세심기법을 모아보면, i)관수세심(觀水洗心), 관어세심(觀魚洗心), 청풍세심(淸風洗心), 관인세심(觀人洗心), 관풍세심(觀風洗心), 주마간산(走馬看山), 시송세심(詩誦洗心), 음풍농월(吟風弄月), 범주세심(泛舟洗心), 집필세심(執筆洗心) 등이 있다. 고찰 스님들에겐 관음선좌(觀音禪坐), 독경세심(讀經洗心), 회두청산(回頭靑山), 사경세심(寫經洗心), 염불세심(念佛洗心) 등이 있었다.

오늘날 술꾼이라면 ‘세심(洗心, Senshin)’이란 일본 아사이주조(朝日酒造)의 술 이름이라는 정도는 다 알고 있다. 일제 병참기지였던 대구에 일본인들이 남겨두고 간 ‘마음씻기’ 술 문화를 살펴보면, 세심주 한 잔에 “한가롭게 앉아 있으니 솔바람까지 들리네”, 두 잔에 “하루하루가 좋은 날이니”이니, 석 잔엔 “세상 여의주가 손바닥에 주어졌는데도”, 넉 잔은 “평상심을 찾는게 도리니”, 다섯 잔을 마시고부터 “신발을 신기 위해 발밑을 봐야 한다.” 그러고 보니 이것이 일본인들 ‘평상심을 찾음(尋常)’이니라. 아사라! 일본인 전용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는 명칭이 여기에 연유했다니. 비틀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꽃들 치마 속을 헤집고 나왔기에 향기가 내게 날아 드는구나”라는 일본 친구 녀석이 던졌던 하이쿠(俳句)가 기억난다.

한편, 중국 친구 녀석의 세심은 당나라 시인 사마퇴지(司馬退之)가 읊었던 풍월을 소개하면 “명리(名利)는 먼저 밟아보지 않아도, 땅과 먼지는 밟기도 전 낌새로 뭔가 느끼게 되지. 쌀밥과 기장밥은 먹지 않아도, 정신을 맑게 함을 느끼게 된다네. 비단 자락이 물 위에 떠내려가는데, 해와 달의 밝기는 순간이 아니네, 산이 날씬하고 소나무 또한 가볍게 흐려가네. 학은 늙어도 사뿐히 날아오르네. 세상 천하를 다 가슴에 넣은 그대에게 비취색이 오래 가겠네. 초목은 옛 빛깔 그대로라. 닭과 개도 새로운 짖는 소리가 아니라네. 그대는 세속에 뜻을 갖고 태어나겠지만, 영웅호걸의 명예를 탐하지 말게나. 오만한 모습의 관대를 풀어 벗어 던지고, 인간의 본정을 다시 나눠 가지세. 세상 떠남은 붉은 저녁놀의 길목에 있으니, 새벽을 향해 여명이 뜬다고 하겠지.” 이어 “저녁 북소리와 새벽 종소리는 기러기를 빨리 날아가게 하고, 날아가는 비구름과 노을에 물든 바다는 참선에 마음을 씻어주네. 세상 속 먼지는 한 자락의 꿈이란 나그네가 되었네. 달빛 아래 맑은 바람은 소박한 거문고를 타게 한다네.”라는 시구가 회상된다.

황도주(1585~1646)의 ‘세심시(洗心詩)’를 적어보면 “우나라 하나라도 세상엔 한 톨의 먼지였고, 만경창파는 두루마기 옷깃 펄럭거림이겠지. 꽃잎 떠내려오는 개울물을 대숲이 덮으니, 절구공이로 사립문짝 버티게 하네. 이미 하늘에는 꿈같은 게 없다고 믿고 있기에, 눈만이라도 내릴 것이라고 보이지 않네. 눈 닦고 넓고 넓은 세상을 보니, 세상은 다 같이 그리 호락호락 하지는 않는가 보네.”

일전에 세심정 옛터에 앉아 생각을 했다. 금호강이 대구시민에게 던져주는 미학이 뭘까? i) 도원결의처럼 의기투합하여 세상 뒤집기도 가능한 “우리가 남이가?”라는 기백이 세심정의 탄금성에서 일어났고, ii) “떠날 때는 미련 없이 모든 걸 털어버려라.” 혹은 “줄 바에는 홀~라~당”했던 어느 주모의 말씀처럼, iii) 의리의 돌쇠들이 모였다는 이곳에는 “똘똘말이 손 털기”로 왜곡되었다. 막장엔 “화원교도소 담장 타기”로 변질된 게 큰 아쉬움이다. iv) 적어도 세속에 찌든 마음을 깨끗이 씻고자 한다면 ‘잠시 멍~때리기’라도 하고 가야지. v) 금호강물에 어리는 산 그림자와 같이 미래 그림이라도 겹쳐보고자 하네.

◇팔공산을 등진 금호 거북이가 되고자

우리나라 풍수속담에 “산을 등진 거북이와 바위를 등진 가재(背山龜背巖蟹)”라는 말이 있다. 금호 강변 마을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 속담에 따라 지형지물의 명칭을 정한 곳이 많다. 크게 보면 생태계 순환고리(ecosystem cycle)이고, 아주 좁게 말하면 풍수지리설이다. 금호강 혹은 신천 물길을 명줄로 여겨왔던 옛 선인들은 우순풍조(雨順風調)로 가뭄과 홍수가 없는 풍년을 기원했다. 용왕의 왕자 거북이 혹은 물개에 대한 믿음이 대단했다. 금호강 섶을 살펴보면 경산시 진량읍 대리리 거북바위(龜巖), 구연정(龜淵亭) 및 구연(龜淵)이 있고, 조야동 뒷산 함지산 옆 자락에 자라봉(鼈峰), 금호강 거북이가 가산(팔공산)을 향해 기어올라는 모습을 한 구수산(龜首山) 및 구수산도서관(龜首山圖書館)이 있다. 2010년 대구시는 ‘신천수상치석계획’에 따라 모산(毛山) 손문보(孫文報) 선생이 사재 4억2천만 원을 쾌척해 갖다 놓았던 상동교 인근 거북바위, 대봉교 인근 황소 바위, 그리고 경대교 인근 물개 바위가 물길을 순탄하게 조율하는 버팀목 역할로 신천직류의 허결비보풍수(虛缺裨補風水)에 따른 비방을 기획했다.

이와 같은 허결비보풍수의 하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곳이 바로 일명 둔산(遯山) 대암봉(臺巖峰) 기슭에 자리 잡은 옻골마을(慶州崔氏集姓村)이다. 임진왜란이 지난 1616년 옻골마을에 보금자리를 틀고자 들어온 대암(臺巖) 최동집(1586~1664) 선생이 입향조다. 옻골을 터전으로 잡고자 그는 산천경계를 여러 번 살펴봤다. 대암봉에 거대하고 역동적인 생생한 거북바위(生龜巖)가 있었다. 그믐밤에도 뿌옇게 보이는 흰 바위였기에 당시 소중한 쌀가루처럼 보였다. 그래서 ‘쌀가루 바위(米粉巖)’ 혹은 ‘가루 바위(粉巖)’라고 했다. 이와 같은 ‘가루 바위(粉巖)’가 전국적으로 많으며, 웅진군 대청면에서도 있다.

최동집 선생은 오늘날 살아있는 거북바위(生龜巖)가 옻골마을을 떠나지 않도록 하고자 i) 알을 놓고 조용히 살도록 ‘귀먹은 것처럼 고요한 연못(聾淵)’을 파놓았고, ii) 동네 남쪽이 금호강으로부터의 수해와 텅 빈 허결(虛缺)을 보완하고자 비보수림(裨補藪林)를 심었다. 하나 더 기획했던 게 바로 오늘날 옻골 선비마을 즉 최씨집성촌이다. 선비들의 문방사우를 마련함에 필수적인 나무였던 관목 옻나무와 교목 회화나무를, 동네 어귀엔 회화나무를 심었고, 대암봉 아래 산자락에는 옻나무를 심었다.

왜 옻나무를? 옻나무는 문갑(文匣), 필갑(筆匣) 등의 문방사우는 물론이고, 붓을 놓고 칼을 잡았을 때(見危授命)는 즉 갑주를 만들 때도 옻은 방부제, 접착제, 살충제 등으로 유용하기 때문이다. 회화나무는? 회화나무는 방부제, 살균제에다가 황색안료로 서책을 만드는데 긴요한 재료였다. 이렇게 빈틈없이 기획설계했던 경주최씨의 보금자리 옻골마을이다.

1644년 농연바위(聾淵巖) 위에다가 농연서당(聾淵書堂, 용수동665-2)을 설립해 종중서당(宗中書堂)으로 역할을 다했다. 경주최씨 대암공파(慶州崔氏臺巖公派) 집성촌으로 오늘날 의젓하며 긍지 높은 옻골(漆谷) 선비마을이 되었다. 이후 대암선생의 5세손 백불암(百弗菴) 최흥원(崔興源, 1705~1786)이 복원하였고 이어 수차례 홍수와 화재로 인한 수리와 중건을 거듭하였다.
 

 
글·그림=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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