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지역 선비들, 서녘호수에 애정 갖고 ‘서호’라 불러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지역 선비들, 서녘호수에 애정 갖고 ‘서호’라 불러
  • 김종현
  • 승인 2023.12.2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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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금호서녘 무릉도원 배움터
병암서원, 도경유 선생이 지어
1675년에는 병암서당 창건해
성주도씨 문중 종회당으로 이용
서호 주변에 와룡산·궁산·문주산
757년에 행정구역 하빈현으로
고려시대 하빈에 사빈 별칭 붙어
조선초기까지 ‘하빈서호’ 애칭
낙동서원
낙동서원(洛東書院) 혹은 덕동서원(德東書院)은 달서구 송현로에 있다.

◇달구벌의 무릉도원(武陵桃源)에 마련했던 배움터

금호 물길을 하나의 용으로 비유하면 금호잠용이라고 표현한다. 머리는 와룡산에 두고, 사족은 신천, 동화천, 달서천 그리고 팔거천이 된다. 그러나 금호잠용을 형성하도록 물길을 만들어주는 분수령으로 팔공산과 비슬산은 물론이고, 동촌 아양루가 위치한 구룡산, 서구 와룡산, 달서구 청룡산과 황룡산이 물길을 마련하고 있다. ‘용의 언덕(Hills of Dragon)’을 뜻하는 용구(龍丘, hill of dragon), 용잠(龍岑, ridge of dragon), 혹은 용강(龍岡, cliff of dragon) 등은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명칭이 용강서원(龍岡書院)이다.

용강서원은 달서구 선원로(33길101)에 위치하고 있다. 허득량과 허복량은 조선왕조실록 1812년 3월13일자 충효열장 고문서에 “대구의 고 부장(副將) 허득량과 그의 종제 고 정(正) 허복량은 정축년 노변(虜變) 때 경상병사 민영을 따라 쌍령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를 향배하는 재실로 1639년에 설립했고, 1868(고종5)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1920년 중창하여 용강사(龍岡祠)라고 했다가 1986년 복원과 9대조 고려문하시중 시충목 허유전을 배향하고 있다.

병암서원(屛巖書院)은 달서구 새방로(용산동 21)에 위치, 도경유(都慶兪, 1596~1636)가 강학당으로 1625(인조3)년에 지었다. 도경유 선생은 조선왕조실록에 3번이나 기록이 나오고 있으며, 1637(인조15) 5월21일자 인조실록에서는“경상 감사의 종사관 도경유를 정배했는데 누군가에게 살해되다”라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1675(숙종1)년에 병암서당을 창건하여 성주도씨 문중 후손의 종회당 겸 강학당으로 이용했다. 1785(정조10)년에 도응유와 도경유 형제를 추모하고자 병암서원으로 숭호하였다. 1868(고종5)년에 훼철되었다가 1924년 유림과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낙동서원(洛東書院) 혹은 덕동서원(德東書院)은 달서구 송현로7길32(상인동880)에 위치, 1708(숙종34)년에 건립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와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봉해졌던 단양우씨(丹陽禹氏) 우현보(禹玄寶, 1333~1400)와 임진왜란 의병장 우배선(禹拜善, 1569~1621)의 향사를 위한 서원이었다. 우배선(禹拜善, 1569~1621)에 대하여 선조실록에선 7번이나 나오고 있다. 1868(고종5)년에 훼철되었다가, 1965년 17대손 우종식, 우종목 형제가 사재를 털어 재건하고, 낙동서원(洛東書院)으로 개명한 뒤 지역유림에 기부했다.

도원동(桃源洞)은 멀리 황룡산(黃龍山. 673m 일명 鵲峯)을 바라보는 청룡산(靑龍山, 793.6m 증봉 甑峯) 그 위용 아래에 청룡굴(靑龍窟)을 거쳐 흐르는 도원천(桃源川) 물섶에 모여들었던 집성촌으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하게 하는 신이 손수 틀어 만들 보금자리(神皐福地)인 자연부락이었다. 선인들은 이곳에서 양택만 택리하지 않고, 사후의 유택지(幽宅地)까지 마련하고자 했다. 즉 산세가 앞산(大德山)을 백호(白虎)로, 삼필봉(三筆峰)은 청룡이 되며 최정산(最頂山)은 바로 현무(玄武)이고, 와룡산(臥龍山, 299.7m)과 궁산(窮山, 250m)은 안산(案山)의 주작(朱雀)이 되어 명당이라고 했다. 도원동은 원덕마을, 못밑마을(淵下里) 과 수밭마을로 구성되었는데 최근에 택지개발로 수밭마을(일명 수박골)만 거의 유지하고 있으나, 나머지는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집성촌으로 말하면 원덕마을과 못밑마을(淵下里)은 동래정씨(東萊鄭氏)와 담양전씨(潭陽田氏)의 집성촌이었다. 이에 반해 수밭골(일명 수박골)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집성촌이었다. 월광수변공원 주변에 재실로는 수밭마을(도원동 1068)에 밀양박씨(密陽朴氏)의 도원동 입향조 도암공(桃菴公) 박민호(朴敏豪, 1568~1645)를 추모하는 재실인 도원재를 후손이 1983년에 세웠다. 그는 만력년간(萬曆年間 : 1573~1619) 큰 국난이 날 것을 예상하고 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들어왔으며,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산성을 쌓아 적을 방어했다. 한편, 도원경노당 옆(도원동 1117)에는 1946년에 건립된 고령김씨(高靈金氏)의 ‘위선재사(爲先齋舍)’였던 방해재(放海齋)가 있다.

◇금호 서녘 물 섶(西琴湖) 집성촌의 배움터

금호강 서녘호수에 지역 선비들은 특별한 애정을 갖고 ‘서호(西湖)’라고 했으며, 중국 항주의 서호(西湖)보다도 더 많은 사랑을 쏟았다. 주변 와룡산(臥龍山), 궁산(窮山), 문주산(文朱山), 사북산(泗北山, 飛鳳山) 아미산(峨嵋山, 架亭山), 마천산(馬川山) 등 산골짜기 샅(골)에서 흘러 내리는 미터(물 섶)는 오늘날 의미로 닻(錨, anchor) 혹은 돛(帆, sail)에 해당한다. 757(경덕왕16)년에 행정구역 명칭을 중국한자로 표기하여 多斯只縣을 하빈현(河濱縣)으로 개칭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하빈(河濱)에다가 사빈(泗濱)이라는 별칭이 더해졌다. 조선초기까지 ‘하빈서호(河濱西湖)’ 혹은 ‘서호하빈(西湖河濱)’이라는 애칭을 사용해 왔다.

그렇게 불려지다가 1614년 한강 정구 선생이 ‘사빈(泗濱)’이라는 명칭대신에 공자의 고향 산동곡부(山東曲阜)의 사수(泗洙)에서 착안해 사수마을(泗水里, 오늘날 사수동)로 불렀다. 그는 오늘날 사북산(泗北山, 사수동 뒷산)을 비봉산(飛鳳山)이라고 칭하였고, 비봉귀소(飛鳳歸巢)에 해당하는 길지에다가 ‘사양정사(泗陽精舍)’를 마련해 후학양성에 몰두했다. 사수하빈(泗水河濱)은 학문적 물길이 연결되어 ‘사빈학파(泗濱學派, Sabin School)’ 혹은 오늘날 ‘낙중학(洛中學)’을 탄생시켰다.

금호 서녘물섶에 배움터를 열었던 선인들의 자취를 살펴보면, 이강서원(伊江書院)은 다사읍 이전리에 소재하며,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1639(인조17)년 건립하였다.

먼저 서사원 선생에 대해선, 조선왕조실록에 5번이나 기록이 나오며, 선조실록에 4번이고 관직제수가 기록되어 있고, 1694(숙종20)년에서는 “그때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이란 사람이 이 기록의 사본(寫本)을 만들어 동궁(東宮)에 올리려고 하므로, 한강 정구(鄭逑) 선생이 글을 보내 만류했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대저 정구(鄭逑)의 글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심경질의(心經質疑)의 사본을 올림은 매우 훌륭한 뜻이요 매우 훌륭한 일이라”라고 사후 79년 후에 학문을 언급할 정도로 깊이를 더했던 지역학자였다.
 

 
글·그림=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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