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제1호 사립미술관 권정호미술관 개관...“현대미술 수집·교육 통해 지역문화 성장 밑거름 될 것”
대구 제1호 사립미술관 권정호미술관 개관...“현대미술 수집·교육 통해 지역문화 성장 밑거름 될 것”
  • 황인옥
  • 승인 2024.03.12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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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부터 작업세계 한눈에
지역 현대미술 조망 기획전 추진
인문학 강연·공연 등 문화행사도
40대 미국 유학 선진미술 경험
신표현주의 속 내용은 동양성
지하철 화재 전시 등 사회 참여
 
권정호미술관 전시장 전경. 권정호미술관 제공
권정호미술관 전시장 전경. 권정호미술관 제공

 

지난달 28일에 개관한 대구 제1호 사립미술관인 권정호미술관(Kwonjungho Art Museum, KAM)에서 지층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했다. 권정호미술관에 권정호 작가 개인의 미술사와 대구 현대미술의 흐름을 녹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퇴적 작용에 의해 차곡차곡 쌓여진 지층을 통해 시대의 흐름에 따른 지질의 변화 과정을 품고 있는 지층이 지구의 지질 역사를 머금은 타임캡슐이듯, 권정호라는 예술가의 삶의 궤적과 대구현대미술의 역사를 정립하려는 권정호미술관이야말로 또 다른 결의 지층이자 타임캡슐처럼 다가왔다.

“권정호미술관은 권정호라는 개인 작가의 차원을 넘어서 대구의 토양에서 지역 작가들이 어떻게 성장했고, 대구의 현대미술이 어떻게 꽃을 피워 나갔는지에 대해 수집하고, 연구하고, 전시하고, 교육하는 것을 통해 지역 문화를 이해하고 성장을 돕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것이 권정호미술관을 개관한 권정호 작가의 운영방향이다.

권정호 작가가 권정호미술관 개관전에 설치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황인옥 기자
권정호 작가가 권정호미술관 개관전에 설치된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황인옥 기자

 

◇ 권정호미술관 개관

권정호미술관은 국내 미디어아티스트 1호이자 건축설계사무소 ‘큐빅’을 운영했던 박현기 작가가 기본 드로잉을 하고, 신동방건축이 건축설계를 맡아 35년 전에 권정호 작가가 건축한 건물을 리모델링한 공간이다. 미술관은 수장고인 지하 1층, 3층 1전시실(주전시실), 4층 2전시실(상설전시실 및 강의실), 5층 작업실, 6층 야외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층은 191㎡(58평)이다.

1전시실에는 ‘낙원(樂園)과 죽음’을 주제로 한 그의 개인전이 개관전으로 열리고 있다. 그가 ‘죽음’을 대주제로 꾸준히 작업해온 ‘해골’ 연작과 ‘사운드’ 연작 등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그의 작업세계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됐다.

권정호미술관 옥상인 야외전시장에 설치된 권정호 작가의 해골 입체 작품. 권정호미술관 제공
권정호미술관 옥상인 야외전시장에 설치된 권정호 작가의 해골 입체 작품. 권정호미술관 제공

 

옥상 공간을 활용한 6층 야외 전시실에는 부산비엔날레에서 큰 이목을 끌었던 4m 높이, 4t의 규모인 대형 작업 ‘시간의 거울’ 작품이 설치됐다.

그리고 수장고에는 그의 작품을 비롯 남춘모, 송광식 등의 작품과 100여점과 민간불상, 서예작품, 근대기 작품 등의 수집 작품들도 소장돼 있다.

개관전 이후에는 그의 상설전 외에도 지역의 현대미술을 조망하는 기획전도 추진하게 된다. 올 하반기에는 고 정점식 작가부터 김결수 등 지역 작가 20여명의 단체전과 개인전을 기획하고 있다. 전시뿐만 아니라 미술 교육 프로그램, 인문학 강연 및 공연 등의 다채로운 문화행사들도 마련된다.

◇ 서양의 신표현주의로 동양의 정신성 녹여내

작가 권정호의 인생은 끝없는 도전과 혁신으로 점철됐다. 유년시절에 그림에 관심을 보였지만, 영남대의 전신인 청구대 토목건축과로 잠시 외유를 하다, 미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계명대 미술대학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세계로 뛰어들었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계명대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전환점은 40대에 찾아왔다. “늦은 나이지만 미국유학을 감행했어요.” 이유는 선진 미술 경험에 맞춰졌다. 자본주의의 꽃을 피우고 물질만능주의의 선봉을 달리는 미국에서 일본을 통해 이식된 현대미술이 아닌 서양미술의 본류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미국 뉴욕 프랫인스티튜트에서 수학하며 서구문화의 정수를 직접 눈으로 보고 공부하고 경험했다.

그의 예술인생에서 의미있는 행보도 미국에서 시작됐다. 1985년 뉴욕 프랫 히긴스홀과 한국문화원 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는 물론 도쿄, 상하이 등에서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였다.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한 그는 대구대 조형예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25년간 재직하고, 퇴직 후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쳐왔다.

미술유학을 계기로 작업세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경험했다. 국내 미술계가 미니멀리즘과 단색화 위주로 흐르던 시기에 그는 과감하게 신표현주의를 구사했다. 미국 유학 이전에는 ‘점’ 연작을 통해 창호지 형태의 점을 그리거나 붙이며 추상적으로 표현했지만 미국에서 미니멀리즘의 절제와 개념미술의 냉정함과 이별했다. 미국에서 감정과 열정, 즉각적인 감각에 집중하는 신표현주의의 활황을 목도하며 신표현주의적 경향으로 돌아섰다. 그때부터 화폭에 인간과 세상에 대해 느끼는 자신의 감정 상태를 가감 없이 표출했다.

“미국 유학 시기에 물성이나 노동의 숭고함이 인간의 문제를 다루기에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내게 단색화는 건축의 일부를 떼어놓은 것과 다르지 않았죠. 그때 제가 주목한 것이 인간이었어요. 인간의 감각, 감정, 열정들이 보였죠.”

‘소리’ 연작과 ‘해골’ 연작은 그의 대표작이다. ‘소리(SOUND)’ 연작은 1984년 미국에서 처음 발표했다. 미국 유학 시기에 ‘소음’에 일상적으로 노출되면서 스피커를 캔버스에 오브제로 올리거나 스피커 형상을 그리는 방식으로 소리에 대한 시각화에 몰두했다.

‘해골’ 연작은 어린시절 아버지의 병원에서 목격한 인골에서 영감을 받아 집중도를 높인 작품이다. 그는 ‘해골’을 암울했던 시대상과 그 너머의 죽음까지 아우르며 개념적인 확장을 거듭했다. 혹자는 해골을 데미안 허스티의 전매특허처럼 생각하지만, 권정호는 데미안 허스티의 해골보다 20년 앞서 형상화됐다. 1990년대에 그는 ‘하늘’ 연작과 ‘선’ 연작을 통해 심화된 추상으로 회귀했다. 선(線)이라는 조형요소에 집중하며 해골을 해체한 시기였다. 그의 선들은 선험적인 몸의 감각에 대한 표현이자 동양화의 일필휘지였다. “선을 통해 동양성을 부각했어요, 제 안에 내재된 근원적인 감각으로서 선을 바라보았지요.”

단색화 대신 신표현주의를 따랐지만 내용적으로는 동양성에 기댔다. 60여년 간 현대미술을 구사했지만 그는 동양의 감각과 동양의 정신을 예술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미국에서 깨달은 결과였다. 음(陰)과 양(陽), 혼(魂)과 백(魄), 삶과 죽음, 근원이나 본질에 대한 탐구 등이 그가 평생에 걸쳐 사유한 주제들이다.

그의 전매특허처럼 된 닥으로 만든 속이 텅 빈 해골 입체 작품이 등장한 시기는 2010년부터다. ‘골고다’와 ‘생명의 탄생’과 같은 반입체도 이때 등장했다. “입체 해골을 통해 형식에서 자유로움과 개념에서 확장성을 담보하고 싶었어요.” ‘골고다’, ‘생명’ 등의 종교적 암시와 ‘미래’. ‘시간’, ‘명상’ 등 철학적인 주제까지 아울렀다.

◇ 대구현대미술사의 산증인으로서 역사 정립하고파…

대구예술에 강한 애정을 보인 것도 그다. 대학 교수와 작가를 병행하는 와중에 한국미술협회 대구시지회장(이하 미협)과 대구예총 회장직을 맡아 대구예술의 골격을 설계하고 추진하는데 열정을 불태웠다. 대구에 미술관이 부재하던 시기에 미협 회장 자격으로 대구미술관 건립을 호소하고 대구미술관 건립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했다. 예총 회장 재직 시기에는 대구문화재단 설립과 대구 국제오페라축제, 대구컬러풀(Colorful) 축제(現 파워풀 Powerful 축제) 등 대구를 대표하는 축제를 신설하기 위한 골격을 구축하는데 참여했다.

“지금 대구국제오페라축제나 파워풀 축제는 대구를 대표하는 축제가 됐고, 대구미술관은 대구미술의 위상을 증명하는 공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대구 문화의 핵심 기반들의 초석을 놓는 일에 참여한 일은 보람으로 기억됩니다.”

대구에서 미술운동을 누구보다 빨리 선도한 것도 그였다. 1970년대에는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가 열리기 이전에 이미 ‘청목회(1971년)’를 만들었고, 이후 ‘아트 신테’(1995년)라는 미술단체를 만들어 신표현주 미술 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그를 비롯 전수천, 허황, 우제길, 유휴열, 이명미 그리고 남춘모 등의 작가들이 한국 현대미술의 혁신과 도전을 외쳤다고 한다.

“‘아트 신테’야말로 대구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했던 한국 현대미술운동이었어요. 당시 지배적이었던 단색 위주의 추상 작업에서 한 걸음 비껴나 또 신표현주의를 주창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혁신적이었어요.”

그가 대구예술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아니었다. 독재 정권 집권 시기와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등의 아픔을 작업에 녹여내며 예술을 통한 사회참여에도 적극성을 띠었다. 그는 내년에 대구지하철화재 참사를 주제로 한 전시를 기획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지난 60여년 간 대구시민으로, 작가로, 문화행정가로 활동해온 그는 대구역사와 대구예술 역사의 산증인이다. 권정호미술관이 대구와 대구미술 그리고 작가 자신의 예술적인 행보들을 정리하고 소통하는 공간이 되기를 희망했다. 권정호라는 지층에 켜켜이 쌓여진 풍요로운 역사적 자양분이 권정호미술관을 통해 전해지게 바랐다.

“미술관을 개관하면서 평생 꿈이 실현됐다”고 말하는 그에게 남은 과제는 운영에 필요한 예산이다. 어렵게 개관은 했지만, 운영비 조달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의 바람은 권정호미술관이 대구와 대구시민들에게 대구미술의 자원으로써 관심을 받는 것이다. “어렵게 좋은 공간을 마련한 만큼 대구시민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미술관이 되었으면 합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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