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가른 틈,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묻다…갤러리오모크, 류현욱 개인전
화면을 가른 틈, 현상과 본질의 관계를 묻다…갤러리오모크, 류현욱 개인전
  • 황인옥
  • 승인 2024.03.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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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죽음서 시작된 ‘slit’ 연작
무질서하게 어우러진 선과 면
에어 브러쉬 분사 점 효과 획득
직선·격자무늬로 구조화까지
불교 세계관 色·空·業으로 확장
작품서 色=현상·空= 본질 의미
상반되지만 묶여있는 관계 표현
류현욱작-violet-maria
류현욱 작 ‘violet, maria’. 갤러리 오모크 제공

비정형의 선과 면이 무질서하게 어우러진 화면에서 “어린아이가 한 바탕 놀다간 흔적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러나 스프레이나 에어 브러쉬로 분사해 얻은 점과 같은 효과에 시선이 머물자 고도의 계산에 의한 장치임을 직감한다. 선과 면, 분사로 얻는 효과 사이에 직선이나 격자무늬로 블라인드 같은 레이어로 이중적으로 구조화한 방식에선 작가의 냉철함도 감지된다. 류현욱 작가가 갤러리 오모크 개인전에 소개하고 있는 ‘slit’ 연작이다.

미술이 작가 개인의 내면 상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논리는 언제나 참이다. 설사 완벽하게 객관성을 확보했다고 우기는 경우라도 개인사나 경험, 감정, 인식 상태 등 작가 개인에게 축적된 시각들이 어떻게든 그림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류현욱은 자신의 ‘slit’ 연작이 불운한 가족사로부터 출발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가족의 죽음을 지켜봤고,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뼈아픈 상처가 됐다. 싫든 좋든 가족의 죽음이라는 개인의 서사가 어떻게든 작업의 밑바탕에 깔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의 상청와 상실감이 저를 지배했고,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작업에 표출됐어요.”

‘슬릿(slit)‘ 연작에서 서술하려는 개념은 ’색(色)’과 ‘공(空)’, ‘카르마(karma·업(業))’ 등의 불교적인 세계관이다.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의 서사가 불교적인 세계관으로 확장됐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죽음의 긍정적인 승화이자 작업에 대한 개념적인 확장이었다. ‘슬릿(slit)’ 연작의 중요 개념인 색은 현상을, 공은 본질을 말한다. 불교에선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라며 공과 색을 물과 파도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설파한다.

그의 작업에서 시각적인 요소로 기능하는 ‘slit’은 길게 베인 틈이나 선(line)을 의미한다. 비정형의 선과 색면으로 파동을, 물감의 분사로 드러난 점과 같은 효과를 입자로 은유하고는, 격자무늬나 세로줄로 블라인드 같은 이중적 레이어 구조를 만든다. 이처럼 그는 서로 상반되지만 필연적으로 묶여있는 색과 공의 관계성을 은유와 시적인 지점 사이에서 형식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레이어를 통한 파동과 입자의 관계맺음으로 공과 색을 은유한다.

그가 “회화는 시각적인 진동을 매개로 관객에게 전달되며, 그 진동은 파동의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회화는 물리적으로 입자이며, 동시에 파동과 진동의 성질을 가지게 된다고 여겼어요”

‘슬릿(slit)‘ 연작은 그의 초기작인 ‘나날들(days)’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나날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집중했던 ‘나날들’ 연작에서 그는 감각적인 옷을 입은 얼굴 없는 상체나 하체, 또는 팔 등의 인체를 그리거나 셔츠 등의 옷을 구상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그는 시각적으로 대상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구상을 그렸음에도 추상화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죽음이나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구상으로 구분하는 것에 무리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개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추상이죠.” 시각적인 구상이 개념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매개로 활용된다는 지점에서 추상을 바라봤다.

죽음이나 상실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감각적으로 차려입은 얼굴 없는 상체나 하체, 또는 손과 다리 등의 인체로 표현한 것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영화들에서 감화된 영향이 있다. “제가 본 남미 영화들에선 환상적인 요소들이 늘 있었고, 그것이 제게는 특별한 감수성을 자극했습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는 ‘Layers’ 연작으로 변화를 시작했다. d[어 브러쉬 드로잉과 불상이나 중세 시대의 인체 조각상 등의 이미지를 중첩한 작업이었다. 빈 화면 위에 에어브러시(airbrush) 드로잉을 하고, 드로잉 사이사이에 뱀과 늑대, 역사 속 명화나 종교화 등의 이미지를 고전 기법인 브러시페인팅(brushpainting) 드로잉 하며 기법적인 층위를 쌓았다.

그는 이런 방식을 공기회화(에어페인팅·Air Paintion)’라 명명했다. “소재의 무거움과 가벼운 표현방식을 병치하며 둘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고 싶었어요.”

2006년에는 ‘blind’ 연작을 통해 블라인드나 커튼을 그렸다. “화면 속 블라인드는 닫힌 창을 의미했어요. 우주로 향하는 외부와의 단절이었죠. 블라인드나 커튼은 제가 그림을 통해서 그림 밖의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 저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하는 의미였죠.” ‘Layers‘ 연작과 ‘blind’ 연작은 개념적으로 확장되며 ‘slit’ 연작으로 잉태됐다.

죽은 가족을 화장해 뿌린 숲을 주제로 한 추상 색면 회화인 ‘애도의 숲(The mourning Forest)’ 연작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집중한 작업이다. 그의 작업들은 내용에서 개인적인 서사로 점철된다. 구상이나 추상으로 다채롭게 표현됐지만 살아가면서 특별하게 경험하는 감정들을 자양분으로 했다. 특히 ‘나날들(days)’ 연작에선 극장 회화라고 할 만큼 이야기 구조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후 작업들은 보다 은유적으로 흘렀다.

류현욱은 사회적인 현상보다 개인적인 경험에 집중하며 보편성보다 개별성에 기댄다. 이유는 “살기 위함”이었다. “저는 굉장히 약한 사람이고, 가족의 연이은 죽음 등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살기 위한 몸부림이 필요했어요. 그 시각적인 결과가 제게는 그림이었죠.” 갤러리오모크 전시는 25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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