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개인전, 바람결인 듯 물결인 듯…일렁이는 생명의 결
김진영 개인전, 바람결인 듯 물결인 듯…일렁이는 생명의 결
  • 황인옥
  • 승인 2024.03.2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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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동원
어머니의 죽음에서 깊은 슬픔
꽃잎서 탄생과 죽음 서사 엿봐
여성에 대한 상징적 개념 담아
더 많이 비워낸 ‘결’ 연작 첫 선
해석 여지 넓히며 본질 가까이
화면 차지한 서예 획 같은 선
한지·캔버스·목탄 재료 다양
Oil on canvas 2024
김진영 작 ‘결’ 연작. 동원화랑 제공

슬플 때의 한 바탕 울음은 슬픔을 정화하는 의식이 된다. 울고 나면 응어리진 슬픔이 조금은 위안을 받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눈물 대신 헛웃음을 흘리기도 한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절망적인 슬픔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면 외마디 한탄만 흘러나온다. 슬플 때 웃는다는 것은 지독한 역설인데,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임계점을 만났을 때의 감정은 상식의 선을 넘어선다.

대구 갤러리 동원과 롯데호텔 울산에서 연이어 개인전 ‘결’을 여는 김진영 작가는 슬픔의 순간을 눈물이나 헛웃음으로 비껴가려 하지 않는다. 캔버스 화면 속에 슬픔의 기운을 차곡차곡 쌓으며 슬픔을 직시한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 것은 2018년. 갑작스러운 어머니와의 이별이 일생일대의 아픔으로 다가왔고, 평생 곁에서 수호신처럼 지켜줄 줄 알았던 그녀의 죽음은 헤아릴 수 없는 상실감을 안겼다. 당시 그의 의식에 내리꽂힌 것이 바람에 떨어져 내리는 벚꽃잎이었다.

땅에 떨어진 꽃잎 하나를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니 묘했다. 만지면 사라질 것 같은 작고 가녀린 꽃잎 하나에 불과했지만 생명 유지를 위한 뼈대와 혈관들이 완벽하게 맞물려 있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꽃잎 한 조각에 담겨진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의 대서사는 경외감 자체였다. 꽃잎 하나가 온 우주를 품고 있는 모습에서 희열을 느끼면서 망설임 없이 화폭에 그렸다. ‘화몽유영(花夢遊泳)’의 시작이었다.

“당시 제게 꽃잎은 인간의 영원한 사유의 주제인 생성과 소멸에 대해 설명하는 존재로 다가왔어요.”

화몽유영의 단초는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이 제공했다. 호접지몽은 중국의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어 즐겁게 놀다가 깬 뒤에 자기가 나비의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자기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핵심은 자아와 외물은 본디 하나라는 것이다.

이 시기 그는 슬픔을 영적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노장사상의 심취였다. 어디에든 마음을 의탁하고 지독한 슬픔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 생각하고는 노장사상을 공부했다. 그 결과 화폭에서 구상과 추상의 공존으로 꽃잎을 형상화하며 생성과 소멸의 경계를 허물어갔다. 화몽유영의 첫 시리즈 ‘잎에 빛을 담다’의 탄생이었다. “꽃잎에 생명성을 표현했어요.” 생명성은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내는 여성에 대한 상징적인 개념으로 활용됐다.

“화려하게 꽃 피우고 씨앗을 남기고 스러져가는 꽃잎의 일생이 마치 여성의 일생 같았어요. 그 여정을 생명성이라는 개념으로 축약해 냈죠.”

화몽유영은 코로나 19를 만나면서 형태적인 변주와 개념적인 확장을 거듭한다. ‘흐르다’ 연작의 출발인데, 꽃잎이 바람을 따라 유영하는 형상으로 표출됐다. 꽃잎의 구체적인 형상 대신 기의 흐름처럼 표현한 것은 본질에 대한 갈망과 맞물렸다. ‘흐르다’ 연작에서 정(靜)·중(中)·동(動)의 개념이 새롭게 등장했다. 정(靜)은 생명의 씨앗, (中)은 생성에서 소멸에 이르는 과정, 동(動)은 씨앗이 실체로 거듭나기까지의 여정을 의미했다. 본질과 실존의 교통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물결무늬는 생명을 잉태해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여성에 대한 형상화였어요. 꽃잎의 변주였죠. 여성이야말로 생명성의 대명사라고 본 것이죠.”

‘흐르다’ 연작에서 그는 노장사상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는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창궐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대면하고 노장사상의 자연관인 ‘자연의 섭리’ 회복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코로나 19 팬데믹을 겪으면서 더 이상 욕망으로 점철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흐르다’ 연작은 표현한 꽃잎의 유영은 더 본질적인 무욕의 세상에 대한 표현이었어요.”

이번 전시에서 또 한 번의 변화가 감지된다. 신작으로 첫 선을 보이는 ‘결’ 연작이다. 전작들에 비해 더 비워낸 것이 신작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형상을 비우고 형상과 여백의 경계마저 허물자 마치 꽃의 요정이 봄바람을 타고 날갯짓을 하며 한 바탕 놀다 간 장면이 연출됐다. 실체는 사라졌지만 허공을 갈랐던 요정의 날갯짓들이 기운의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더 심화된 본질로의 이동이었다.
 

김진영작-SpringWind
김진영 작 ‘Spring Wind(봄결)’. 동원화랑 제공

그가 “바람결일수도 있고 물결일 수도 있다”고 했다. 더 비워내고 추상이 더 심화되면서 해석의 여지는 훨씬 넓어졌다. “힘을 뺀다는 것은 생명의 본질에 더 충실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군더더기 대신 생동감을 끌어들이려 했고, 장식성이 배제된 생동감은 본질과 맞닿아 있게 되죠.”

화면 속의 시각적인 토대는 선이다. 서예의 획을 닮은 선들이 화면에서 유영한다. 재료 역시 한지나 담채를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과 병행한다. 목탄이나 펄프가루도 마다하지 않는다. 한국화를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동서양 회화를 넘나들게 하는 배경이다. 그에게 개념과 물성은 사유 확장을 위한 도구인 셈이다.

“제게 물성은 사유의 세계를 표현하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정신작용을 시각화하기 위한 도구가 물성이기에 물성 연구는 숙명처럼 다가옵니다.” 갤러리 동원 전시는 30일까지며, 롯데호텔 울산 전시는 4월 8일부터 8월 9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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