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익 개인전…국제갤러리 부산·서울 한옥공간 내달 21일까지
김용익 개인전…국제갤러리 부산·서울 한옥공간 내달 21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4.03.25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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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고뇌’ 반복이 작업 지속하게 만든 힘의 원천
‘질서-혼돈’이 예술세계 키워드
모더니즘 미술 일원되려고 노력
과학·물질 풍요에 모더니즘 종말
“물감 소진 때 내 삶도 끝났으면…”
죽음 두려움에 맞선 나름 제스처
칠순 넘긴 지금 혼돈 상태에 빠져

 

김용익작-물감소진프로젝트
김용익 작 ‘물감 소진 프로젝트 23-3-1 망막적 회화로 위장한 개념적 회화’.

화면이 사각으로 조각조각 분할돼 있다. 단순하지만 엄격한 규칙이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사각에 색을 칠하자 화면은 금세 혼돈으로 치환된다. 규칙에 의한 사각으로의 분할에 불규칙한 색채가 더해지며 화면은 혼돈에 의한 팽팽한 긴장감으로 휘몰아친다. 하지만 변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한 번의 세포분열을 감행한다. 색을 칠하는 방식에 고도의 질서가 부여되는 것. 그 결과 헤링본 무늬나 원 등의 새로운 조형성이 잉태된다. 국제갤러리 부산점과 서울 한옥 공간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김용익(76) 작가의 ‘물감 소진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이다. 

김용익_포장되고지워진유토피아
김용익 작 ‘포장되고 지워진 유토피아’ 연작.

 

‘질서’와 ‘혼돈’의 양립은 김용익 작가의 현재 예술세계를 설명하는 키워드다. 그 이면에는 모더니즘이 있다. 그의 예술적 뿌리는 모더니즘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모더니즘 미술에 경도됐다. 계몽주의로 각성된 인간의 이성이 자연과 인간, 세계를 탐구해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진보가 인류를 유토피아로 인도할 것이라고 외친 것이 근대 모더니즘 프로젝트의 기치였다.

당시 그가 모더니즘 미술에서 느낀 매력은 하나였다.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인식론에서 모더니즘은 선연한 논리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모더니즘 미술의 일원이 되기 위한 투지를 누구보다 가열차게 불태웠고, 관심사를 미술 너머로까지 확장해갔다. 서양의 근대 문명사 속 모더니즘 프로젝트로까지 주제를 확장한 것이다. “미술로부터 시작한 모더니즘에 대한 공부가 문명사로까지 넘어가게 됐어요. 그만큼 모더니즘은 매력적이었어요.”

김용익 작가가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는 자신의 개인전에 걸린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황인옥 기자
김용익 작가가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고 있는 자신의 개인전에 걸린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황인옥 기자

국제갤러리 부산점 전시 개막식에서 만난 그가 “모더니즘은 끝났다”고 한탄했다.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과 물질적인 풍요 등으로 수렴되는 모더니즘 프로젝트가 추구한 유토피아는 일부 실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로 인한 폐해는 모더니즘 프로젝트의 꿈을 아련하게 만들었다는 한탄이었다. 그 이면에 극심한 양극화와 인간성 상실, 자연파괴, 전쟁과 테러 등의 재앙적인 현상들이 자리한다.

그는 모더니즘의 굴곡진 여정을 평생 지켜봤고, 마침내 종말의 순간까지 함께 했다. 그렇기에 그 여정을 꿰뚫는 핵심 개념인 질서와 혼돈이 그의 작업의 현재성으로 자리를 잡은 것에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휴대폰과 컴퓨터, 자가용 없이 살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인간의 욕망은 계속 몸집을 키웠고, 우리가 꿈꾸었던 유토피아의 꿈은 희미하게 멀어지고 있습니다.”

모더니즘의 종말과 그로 인한 혼돈은 그가 진단하는 동시대성이다. 그는 모더니즘 미술의 도상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것으로 모더니즘 미술의 추억을 소환하지만 이내 무규칙적인 물감 바르기를 통해 혼돈의 상태로 태세를 전환한다. 헤겔의 변증법으로 설명하면 테제인 정(正)과 안티테제인 반(反)이 갈등하는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모더니즘은 실패했고, 우리가 믿었던 가치들이 우리를 배신했습니다. 그 결과 혼돈의 세상이 됐습니다.”

스스로 모더니즘의 종말을 인정하지만 그가 모더니즘이 주창했던 개념 중 하나인 ‘질서’를 화면에 구축하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모더니즘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 가지는 아련한 추억쯤으로 이해해 달라”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평생에 걸쳐 탐닉했던 모더니즘인데 그것이 끝났다고 해서 완전하게 이별한다는 것은 자기부정적인 태도일 수 있다는 속내였다.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과학이나 질서 등의 가치들이 지금의 진보를 이룬 것은 부정할 수 없고, 저 역시 모더니즘의 혜택을 받았기에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추억하는 것 같습니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 연작에는 노년의 그가 죽음과 작업을 대하는 태도가 숨겨져 있다. 그가 “물감이 소진되는 순간, 내 삶도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할 정도로 현재 그의 작업은 죽음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예술과 삶의 일체화에 대한 염원일 수 있다. 그러나 인생 100세 시대. 이제 70대 중반인 그가 더 이상 물감 사는 것을 중단하고, 보유한 물감만으로 20~30년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선호하는 색상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고, 얇게 칠하는 방식으로 남은 물감의 효율성을 최대화하려 노력한다. 그 마저 모두 소진될 경우 “가지고 있는 색연필이 물감을 대신하면 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예술과 삶의 동일시에 대한 완고한 표현이었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는 벼랑 끝 전술처럼 보인다. 죽음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면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싶지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방어선처럼 다가온다. 그 역시 “내 작업이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제의적 행위라는 것은 주제넘다”라며 선을 그었다. “예술과 삶의 일치라는 것은 너무 과한 표현이고, 그저 단순한 아이디어 차원으로 봐 달라”고까지 했다. “그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는 저 나름의 제스처로 봐 주시면 됩니다.”

칠순을 훌쩍 넘긴 그가 스스로를 “갈수록 혼돈상태”라고 했다. 젊은 시절의 내면이 오히려 명료했다고 했다. 호기심은 많았지만 지식이나 정보, 경험이 일천했고, 그래서 복잡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년기인 지금은 오히려 축적된 지식이나 경험들의 무게에 짓눌리고, 그에 따라 혼돈상태에 빠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애써 혼돈을 걷어 내고 명료하게 정리하려 들지 않는다. 혼돈을 의식하면 작품이 경직되고 의도적인 개입이 짙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그럴 경우 작품에서 진정성은 요원하게 된다. “나이 들어 기억력이 없어지는 것도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모순된 행동이나 발언이 작업에 끼어들어도 괜찮습니다. 그걸 받아들여야 정직한 작업이 나오니까요.”

그는 일명 ‘땡땡이 화가’로 불린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 연작이나 ‘아련한 유토피아’ 연작, ‘절망의 미완수’ 연작에 동그라미, 즉 땡땡이가 다양하게 변주된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 연작 속 기하학적 도형이나 땡땡이는 그의 의식이 어디를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모더니즘의 가치였던 이성이나 과학 대신 존재의 본질, 주역의 양(陽)과 음(陰), 동양사상의 우주론, 정역의 후천세상 등의 철학적인 주제들로 시선을 돌렸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우주나 존재의 근원 등의 동양철학적인 주제들을 심화하는 계기가 됐다. 동양철학에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찾은 것이다. “‘물감 소진 프로젝트’ 연작은 이성이나 감성에 의했다기보다 갑작스러운 계시에 의해 시작됐어요. 모더니즘의 정신과는 거리가 있죠.” 무엇보다 그는 그동안 진보와 발전, 경쟁과 지배에 초점을 맞췄던 양의 기운에 새롭게 돌봄과 섬김, 우애와 평등 같은 음의 기운을 추가하며 음양의 조화로운 세상을 염원한다.

모더니즘은 ‘종말’을 고했지만 그는 인류의 운명까지 ‘종말론’으로 보지는 않는다. 동양의 고전에서 “부정의한 것들이 정리는 되지만 결코 종말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지금의 혼돈이 또 다른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정임을 직시한다. 그 혼돈의 시기에 그는 자신의 역할을 찾는다. 그것이 그가 경험했던 모더니즘의 역사를 증언하는 것이다.

“모더니즘의 마지막까지 지켜본 사람으로서 저와 저의 주변, 그리고 평생 제가 해온 미술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제가 처한 상황을 정직하게 증언하고 싶었어요.” 그렇더라도 그는 미래까지 예단하는 것에는 선을 긋는다. “미래는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지요.”

그는 평생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고뇌했다. 화면 속 숨김과 드러남의 연속적인 행진은 그가 평생 던졌던 질문과 고뇌에 대한 표현일 수 있다. 질문과 고뇌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련의 작업과정에서 그는 절망을 맛보기도, 작은 희망의 징후를 발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둘 사이의 긴장감은 그가 작업을 지속하도록 이끄는 힘의 원천이 됐다. 전시는 4월 21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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