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팔조, 김현정 개인전
갤러리 팔조, 김현정 개인전
  • 황인옥
  • 승인 2024.03.2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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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증기처럼 쌓아올린 사색의 장소, 호수
선으로만 단순하게 그린 풍경
물 속·물 밖, 데칼코마니 형태
타자에 나 투영하는 심리 표현
밝은 컬러는 ‘이상향 향한 염원’
물 묻힌 붓 두드리고 말리기 반복
몽환적인 분위기로 화면 가득 차
Decalcomanie2024
김현정 작 ‘Decalcomanie’. 갤러리 팔조 제공

호수의 매력은 잔잔함에 있고, 그 잔잔함이 힐링 포인트다. 그러나 호수라고 마냥 잔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호수에도 나름의 격정은 있다. 계절과 날씨와 바람과 공기와 습도에 따라 시시각각 얼굴을 달리한다. 희노애락을 무시로 넘나드는 불완전한 인간의 삶과 매일매일 표정을 달리하는 호수의 풍경은 서로 닮아있다. 어쩌면 인간이 받는 위안은 호수의 잔잔함보다 닮은꼴에 있을 지도 모른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호수에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것도 호수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동댐 주변에서 작업하며 살아가는 김현정(38) 작가에게 호수는 삶의 터전이자 작업의 근원이다. 사시사철, 시시각각 변화하는 호수와 호수 주변의 풍경이 말을 걸어오면 오감을 활짝 열고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호수의 푸념을 들어주고, 때로는 호수에 자신의 찬란한 하루를 자랑하다.

그는 자신과 호수 사이에 오고갔던 대화들을 허공에 흘려보내지 않는다. 호수와 은밀하게 오갔던 나지막한 대화들을 화폭에 한 편의 시(詩)처럼 구현한다. 그가 본 호수의 풍경들은 시적인 함축과 리듬으로 각색되며 ‘The Visage of Water(물의 얼굴)’ 연작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지난 22일 개막한 갤러리 팔조 개인전에 걸린 그의 호수 풍경들은 추상적인 요소가 짙다. 물을 경계로 물 밖 풍경과 물 속 풍경을 데칼코마니처럼 표현하는데, 함축과 은유로 점철된다. 호수 풍경에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순화된 이미지만 남기고 나머지 풍경은 과감하게 배제한다. 특히 산이나 호수, 나무의 형태를 테두리선으로 단순하며 선택과 집중의 묘미를 살린다.

경계지점을 기준으로 풍경을 데칼코마니로 구성했다. 물 밖 풍경과 물 속 풍경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모든 것은 투영된다”는 생각이 자리한다. “인간은 타자에 자신을 투영하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거울과 같은 것이죠. 그런 인간의 내면적인 구조를 데칼코마니로 표현했어요.”

선으로 분할된 모든 면에는 명도가 높은 색을 칠한다. 호수 풍경이 극도의 함축으로 색면추상의 옷을 입은 것이다. 그가 물을 행복감이 넘치는 밝은 색으로 채색하는 이유는 “이상향 에 대한 염원”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늘 불안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실체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지만 항상 이상향에 가까워지려는 마음은 간직하는 것 같습니다.”

색면추상적인 성격이 짙지만 의외로 드라마적인 요소도 발견된다. 색면에 입체감을 확보하는데, 그 방식이 예사롭지 않다. 붓으로 색을 반복적으로 칠해서 입체감을 획득하기보다 캔버스 표면을 두드리고 말리는 반복된 과정 속에서 입체감을 살려낸다. 수증기를 쌓듯이 수많은 두드림으로 물의 입자를 쌓아갔다. 그 결과 화면은 몽환적인 분위기로 넘실댄다. 시각을 끄는 포인트를 따로 설정하지 않아도 표면 자체가 발광체하게 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는 한껏 높아졌다.

“표면을 두드려서 구축한 표면이지만 효과는 아기피부처럼 부드러웠고, 빛이 그 보드라운 표면에 닿았을 때 더 발산하는 느낌이 났습니다.”

비록 추상이지만 물을 기준으로 물 밖과 물 속 풍경을 그렸다는 힌트 정도는 심어놓는다. 어떤 풍경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상을 포인트로 그린다. 마치 무대 위 주인공을 그리듯 나무나 물길 등의 소재를 단순하지만 재치와 위트를 가미해 표현한다. 사실 추상이라고는 하지만 작가에는 구상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현실의 풍경을 재해석했다기보다 그가 호수와 마주했을 때 보이는 형상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호수 풍경을 보지만 안개나 빛에 투사되어 제게 순간적으로 보여지는 풍경은 실물보다 훨씬 이미지화 된 풍경이거든요. 제게는 추상이지만 추상이 아닌 것이죠.”

그도 20대 초중반에는 구상적인 풍경을 그렸다. 그러다 안동댐 하류 풍경에 감화되면서 호수 풍경을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호수를 바라보면 볼수록 물속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됐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에 힘은 들지만 조율하며 맞춰가고 싶을 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하면서 물이 작업의 소재로 자리를 잡았다.

“제가 공상을 좋아하는 좋아하는데 안동댐을 휘감은 안개를 보면서 ‘이거다!’하며 쾌재를 불렀어요. 저의 정서와 호수가 잘 맞았고, 상상의 여지를 넓히는 추상이 제격이다 싶었죠.”

호수 풍경을 추상으로 그리던 초기에는 흰색과 검정색을 위주로 썼다. “흰색과 검정색 중심의 색 사용은 불안정하고 불안한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정서에 대한 자연스러운 표출이었어요.” 색이 다채로워지고 밝아진 것은 결혼과 출산의 효과다. 컨트롤 할 수 없는 갓난아이를 키우면서 강박에 가깝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아이의 성장은 그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컨트롤 되지 않는 아이의 본성을 지켜보며 완벽에 대한 갈망이 자유를 억압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옥죄고 있던 강박들이 하나둘씩 풀어졌다. 가장 먼저 색으로부터의 자유가 찾아왔다. 색에서 자유로워지자 해방감이 찾아왔고, 화면에서도 더 이상 나쁜 기운은 사라지고 행복한 기운만 남게 됐다.

“결국 그림이 곧 작가라는 공식에 대입해보면 제 그림속 행복한 기운은 저의 지금 감정상태에 대한 표현이라는 것이 맞을 겁니다.” 전시는 4월 27일까지 갤러리 팔조에서.

황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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