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더 킹: 헨리 5세’ 어쩌면 셰익스피어에 가장 가까운
[백정우의 줌인아웃]‘더 킹: 헨리 5세’ 어쩌면 셰익스피어에 가장 가까운
  • 백정우
  • 승인 2019.11.1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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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의줌인아웃
 

이스트칩의 창녀는 그를 이렇게 야유한다. “허구한 날 낮에는 싸움질, 밤에는 찌르기를 하는 늙은 몸을 짜깁기해서 천당에 가겠다고?” 그는 술집에 큰 외상값을 빚지고도 기세등등한 허풍쟁이고 사기꾼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한 용맹스런 기사이다. 왕자와 이스트칩 사창가에 자주 나타났을 만큼 격의 없는 사이이자 충직한 조언자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전쟁에 참여하면서도 애국주의의 허위를 비판하고 질책한다. 귀족이면서 사회 밑바닥에 머물며 왕자를 보필했고, 훗날 왕이 되자 책사로 발탁돼 재기발랄한 언어로 직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희극적 인물이자 왕에 직언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존 폴스타프이다. 데이비드 미쇼가 연출하고 티모시 살라메가 연기한 영화 ‘더 킹: 헨리 5세’는 헨리 5세 만큼이나 존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인다.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춤추는 것도 왕과 존의 대화 장면이다. 예컨대 프랑스 왕자의 계략에 흥분한 왕이 프랑스 포로를 참수하라고 명하자 존이 건네는 조언. “전사들이 자신을 위해 일을 꾸미는 걸 수없이 보았지요. 결국 헛된 영광과 살육으로 끝나고 마는 것을 말이죠.” 헨리 5세의 통찰도 못지않다. 밤새 비가 내린 진창에서 맨몸으로 백병전을 치르면 승산 있다는 존의 전술에 나지막이 건네는 말.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고 이토록 위험한 작전을 짰다면 지금 말해.”

스물여섯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잉글랜드 전쟁사에 빛나는 ‘아쟁쿠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서른다섯에 요절하여 전설이 된 헨리 5세. 헨리 5세는 1599년 셰익스피어의 손을 거쳐 부활한다. 셰익스피어는 그를 비범하고 용감하며 지혜롭고 관대한 인물로 그려 영국의 상징으로 높인다. 잉글랜드 통합과 번영을 기치로 내세운 엘리자베스 1세 시대가 낳은 대문호의 선택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대배우 로렌스 올리비에는 영화 ‘헨리 5세’를 만든다. 의심할 바 없이 전쟁 중 영국국민을 독려하여 애국심을 고양시킬 목적이었다.

반면 21세기에 만들어진 ‘더 킹: 헨리 5세’는 영웅의 일대기를 좇거나 애국심 고취에는 관심 없어 보인다. 술과 여색에 빠져 방탕한 시절을 보냈고, 전장에선 자존심 상한 조언을 감수해야했으며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왕비 카트린에게 “쉽게 기만당하는 남자”라고 힐난 들어야했던 사람. 용감해보여도 비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어린 왕이, 영화가 그려낸 헨리 5세의 모습이다.

혹자는 헨리 5세를 이 정도 밖에는 그려내지 못했느냐고 불만 터뜨린다. 브렉시트 결의 후 EU 탈퇴를 세 번이나 연기한 영국의 복잡한 정세와 맞물린 민족주의 영화가 아니냐고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셰익스피어에 가까운 헨리 5세 모습이다.

셰익스피어는 왕족의 역사를 평민의 삶과 의식에 투사하면서 역사의 허구성을 질문해왔다. 그러니까 존과 헨리를 이스트칩 사창가에 등장시키고 하층민의 세계를 전경으로 끌어올린 감독의 미장센은 셰익스피어의 관점과 일치한다는 것. 당시 왕족과 기사 등 지배계급은 매춘부불량배와 어울리면서 허송세월했다고 한심한 눈길을 보내지만, 헨리 5세는 그 시간 동안 쌓은 다양한 삶과 사람에 대한 경험을 통해 세상물정을 익히고 훗날 빼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 영화의 마지막, 스크린에 ‘THE KING’이란 글자가 새겨질 때 밑바닥에서 성장한 영혼이 역사를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는 장관과 만난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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