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송으로 마주할 때
재방송으로 마주할 때
  • 승인 2020.01.20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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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잊고 있었던 옛 드라마를 돌려볼 때가 있다. 재방송을 보듯 지나온 일들에 대해 되돌아볼 일이 잦은 요즈음이다. 새 달력이 그렇고 겨울이라는 계절이 그렇고 신정 지나 구정을 앞둔 날들이 그렇고 그렇다.

같은 영화를 두 번째 볼 때의 좋은 점으로는 ‘긴장되지 않아서….’를 빼놓을 수 없다. 주인공이 끝까지 살아남는지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되므로 대사와 풍경에 더 집중할 수 있어 좋다. 특히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처음 대할 때면 자막을 읽기에도 버거워 내용이나 풍경에까지 집중하기가 어렵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재방송을 보다 보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은 볼 수 있게 된다.

그날이 그날인 듯한 하루하루를 반복할 때도 마찬가지 아닐까. 별일 없이 보낸 하루의 끝에 찾아온 나른한 권태라 할지라도 알고 보면 참 감사한 결말일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로맨스도 반전도 없는 심심한 날들이 이어지고 아무것도 한 일 없이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이 심심함이 곧 평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음악회나 공연장에서의 좌석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어느 영화 속 연극배우가 그런 얘기를 한다. ‘불이 꺼지고 막이 오르면 빈자리를 찾아 앞으로 이동하는 관객이 보이지. 하지만 그건 참 바보 같은 짓이야. 무대 앞쪽은 무대를 올려다보느라 목만 아플 뿐이지 무대 전체를 볼 순 없거든.’ 이 대사는 마치 삶에 대한 어떤 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는 인생을 잘 보기 위해 또는 어떤 사람을 잘 보려고 너무 앞좌석에 앉아서 목이 아프도록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 속 주인공은 또 그런 말을 한다. ‘내가 찾는 건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멋진 오케스트라 좌석이에요’라고.

몽테뉴가 그의 수필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 아무 일도 안, 했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살지도 않았다는 말인가? 산다는 것은 당신의 직업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영예로운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한 셈이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영지를 얻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품행에서 질서와 평온을 얻는 것이 적절하게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쓴 말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한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고 생각한 그런 날이 그의 시선에 빗대어 보자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작품을 만들며 하루를 보낸 것이라 말한다. 쓸모만을 따지고 눈에 보이는 성과만을 따지는 시각이 아니라 이해의 시선으로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새삼 되새기게 하는 말이다.

가끔, 재방송을 보는 그 잠깐만이라도 스토리보다 겨울이라는 배경화면에 더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 생각을 덧보태지 않고 보여주는 데로 관람하며 가장 평온한 자세로 말이다. 좋은 좌석에 앉아 음악을 듣는다거나 공연을 관람하려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음악회의 경우는 어떤지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좀 어렵지만, 연극의 경우는 앞자리라고 해서 좋은 자리라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무대 전체를 볼 수 있는 조금 뒤쪽의 자리가 관객에겐 훨씬 더 좋은 자리일 수도 있겠다 싶어진다. 어떤 뮤지컬은 일 층보단 이층이 좋고 어떤 공연은 음향이 잘 모이는 자리가 좋은 자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재방송이 없는 생방송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찾고 있는 좌석은 지금, 어디쯤일까.

이지혜 시인의 시 ‘차차’ 전문을 필사적으로 필사해 본다. “불꽃이 튄다고 안심할 것도, 나뭇잎이 멈췄다고 불안해 할 것도 없으니. 차차, 두고 봅시다. 우리 사이에 어떤 계절이 들어올지, 어떤 노래가 스밀지, 어떤 술잔이 오고 갈지 모르니까요. 차차, 기다립시다. 생각보다 아주 작은 것들이 우리 둘을 흔들지도 모르니까요. 오늘 아침 보잘것없다고 내 던진 것이 어쩌면 우리를 바꿔놓을지도 모르니까요. 차차, 혼자인 듯 그러나 혼자가 아닌 듯 그렇게 알아갑시다. 허허, 차차는 참 외로운 말이지만요. 흐음, 차차는 참조건 없는 말이지만요. 휴우, 차차는 참 맹맹한 호흡이지만요. 혹시나 설마 혹시나 차차, 춤을 추다가도 못 만나며 다른 리듬으로 만나겠죠. 어쨌든. 오늘부터 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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