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 극재 정점식(3) 아내의 핀잔·대중의 외면에도 ‘예술의 非물질화’ 실천
[서영옥이 만난 작가] 故 극재 정점식(3) 아내의 핀잔·대중의 외면에도 ‘예술의 非물질화’ 실천
  • 황인옥
  • 승인 2020.03.3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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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나 수수께끼 같은 회화
종종 실력없는 화가로 치부
작가의 정신적인 충동 중시
자기목적적 작업 방식 고집
잘 팔리는 작품은 문제 없으나
잘 팔리도록 만드는 수법 경계
매너리즘 빠진 유망 작가 우려
무상·실험적 스타일 특히 장려
정점식작-군상들
정점식 작 ‘군상들’, 1977, 71×59㎝, 캔버스에 아크릴.
 
말
정점식 작 ‘말’, 1977, 72.7×60.6㎝, 캔버스에 유채.

‘예술가에게 돈이란?’ 극재 정점식(克哉 鄭點植, 1917년~2009년) 선생(이하 극재)의 답은 간명하다. “예술가에게 필요이상의 돈은 독이 될 수도 있다.” 극재의 첫 번째 에세이집에 새겨진 글이다.

예술가에게 필요이상의 돈은 독이 될 수 있다고 한 극재의 말은 모호하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사람마다 ‘필요’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보다 말의 맥락에 주목해야할 것 같다. 극재가 생전에 물신주의를 경계하라고 한 것을 상기하면 예술이 돈의 노예가 되는 것에 대한 경각심에 방점이 찍힌다. 그렇다면 극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극재는 검소했다. 계명학교에 재직하며 줄곧 버스로 출퇴근을 할 정도였다. 간혹 강연장이나 전시장을 방문할 때는 제자들이 동행했다. 극재를 존경하는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운전을 하겠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운전을 하며 극재와 동행하는 시간은 강의실에서와는 또 다른 배움의 시간이었다. 가정교육으로 극재에게 체화된 검소함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시대의 산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슷한 시기에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환기(1913~1974)나 장욱진(1917~1990)에 비해 극재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유년 시절은 가난했다. 소수를 제외한 가난은 당시 전 국민의 보편적인 생활상이었다. 그 배경에는 35년간 지속된 일제강점기(1910년~1945년)가 있다. 해방을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6.25 전쟁(1950년)은 국민들을 또 다른 가난으로 내몰았다. 이렇듯 극재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궁핍한 삶의 한가운데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청년기를 맞이했다. 중년이 되어서도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었다. 교직에 몸을 담았지만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의 책무는 금전적인 풍요는 물론 예술가로서의 행보에도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평소 그림을 직업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그림이라는 것이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로 식구들은 내 작업에 대해서 달갑지 않게 여긴다. 따라서 나는 죄를 짓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일을 해야만 한다. 이런 고독한 심정으로 아무리 그것을 식구들에게 이해를 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극재 나이 60세에 신문에 쓴 글 중 일부이다.

가족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극재는 작품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진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생의 절반 이상 가난이 동행했지만 극재는 작품으로 돈 벌 궁리에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 작업 자체에 몰입했다. 극재에게 작업은 학문탐구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수양과 신앙처럼 숭고한 것이기도 했다. 극재의 작품에서 묻어나는 지적이면서도 깊은 사유의 흔적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비전공자들에게 극재의 이런 그림은 어려운 암호나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여겨졌다. 실력 없는 화가로 치부되기도 했다. 극재의 그림은 돈과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도 남들이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림을 그린다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극재는 자신의 작업주관을 방향전환하지 않았다. 극재의 확고한 주관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굳건했다. 극재가 쓴 ‘무상의 작업(無償의 作業)’이란 글 속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1977년(60세)에 작성한 ‘무상의 작업’이란 제목의 짧은 글이 있다. 극재는 이 글 본문에 예술가와 돈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놓았다. 극재는 예술이 ‘작가의 자발적(自發的)인 충동에서 비롯되어서 그것을 조형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했다. 무엇보다 예술가가 먼저 챙겨야 할 것은 정신이지 돈이 아니라고 했다. 극재는 예술이 자기목적적인 행위라는 것을 강조한다.

“자기목적적이라 함은 자기의 내적, 정신적인 충동이나 욕구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영위되는 행위이다. 그것(자기 목적적인 행위)은 돈이나 명성을 앞세우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한다면 자기목적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극재는 자기목적적인 행위는 돈이나 명성이라는 목적 이전의 행위하고 했다. 즉 작업 자체가 목적이지 작업이 돈벌이 수단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의 비 물질화(Non-Materialization)는 극재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예술철학이다.

뿐만 아니라 얄팍하게 유행만을 거나 깊어지기도 전에 가격 매기기에 혈안이 된 학생과 후배들을 꾸짖곤 했다. “요즘 많은 작가들이 일반의 수요나 기호에 접근해가고 있다. 따라서 팔리는 작품이라는 틀이 있다. 그 틀에 맞추어서 그것을 생산해 낸다. 장래가 기대되던 작가들마저도 이런 경향으로 빠지거나 거기에 머무는 매너리스트(Mannerist)들이 적지 않다. 지모(知謀)나 계략에 대립하는 직관적인 기지나 광기와 같은 땀에 젖어 있는 작업이 아쉽다” 극재는 젊은 세대들의 작업에 땀을 요구하며 실험적인 작업이야말로 무상적인 작업이라고 했다.

“이들(젊은 세대들의 실험적인 작업)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생물학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위하여 움직이고 있다. 이 생태 속에서 인간의 순수한 삶을 볼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의식을 높이고 확장하고 인간의 삶을 쇄신(刷新)‘시키는 것이다.”

극재가 1979(62세)년에 작성한 ‘내가 살아온 70년대’라는 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 “지능만을 믿고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은 현대문명의 물결이 지나치게 의도적인 목적에만 얽매여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미술의 호경기를 타고 날뛰는 많은 작가들에 대해서 그것을 경고하는 글과 몇 차례의 강연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극재는 예술 본래의 무상적인 정신이 물질적인 유상물로 전락해가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잘 팔리는 상업적인 작가들의 작품에 그 가치가 조준(照準)되어가는 것에도 불편함을 드러냈다. 잘 팔리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잘 팔리도록 만드는 행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작가들이 잘 팔리는 것에 만족하고 마는 매너리스트가 되는 것을 염려했다. 극재는 미술계에 심각한 그림자를 지우는 이런 현상이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며 예술사회학의 문제로 남겼다.

극재는 예술가와 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예술가는 본래 세속에서 초월적인 존재이다. 이런 예술가들이 지나치게 돈을 의식하는 것은 예술가가 이 나라에서 인식을 받지 못하는 불안한 풍토 때문이다. 일본의 자유주의적인 한 소설가가 전후에 ‘사양(斜陽)이라는 장편소설을 써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자살을 하고 말았다. 그의 유서의 사연인 즉 나는 소설을 써서 돈을 벌었다. 나는 이제부터 할 일이 없어졌다.”

예술가에게 필요이상의 돈은 악이 될 수도 있다고 한 극재의 말에 혹자는 반박한다. 평생 교직에 몸담으며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은 사람이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 말의 핵심은 작품의 가치가 금전의 가치로 평가받거나 예술정신이 금전에 매몰되는 것에 대한 우려로 이해해야할 것 같다. 극재의 말대로라면 ‘예술의 비 물질화는 자기목적적인 예술행위’이기 때문이다.

서영옥ㆍ미술학 박사 shunna9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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