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번지는 시간
저녁이 번지는 시간
  • 승인 2020.06.2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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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연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다. 부분일식이 있을 거란 예보에 몇 시간 째 문 밖을 오가며 서성이고 있었다. 어릴 적, 그림으로 그렸던 태양을 떠올려 본다.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에도 ‘태양은 참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는 듯 그림 속 태양의 얼굴에다 웃는 눈을 그려 넣었었다. 그렇게 한 번 웃게 그려 넣고 나면 마법처럼 울적하고 속상한 기분이 금세 좋아지곤 했다. 한 잠 자고 나면 별일 아니라는 듯 지나가는 일이 많았던 것처럼 환한 웃음이든 아이의 명랑한 웃음이든 혹은 헛헛한 웃음이든 한 번 웃고 나면 치유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살아가면서 깨닫는다. 하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태양은 웃기 시작한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얼마나 성실하게 키워내고 있는지를 알고 나면 여름이야말로 태양이 가장 열심히 일하는 계절이 아닐까 싶어진다.

부분일식을 보겠다고 옥상에 올라 가 보고서야 알았다. 옥상, 반동가리 난 좁디좁은 물탱크 속에서도 흙과 태양의 세례를 골고루 나눠 받으며 가지며 호박, 고추며 부추가 우럭우럭 영글고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긴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내게 보란 듯 제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할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풋풋한 그들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보단 조금 더 빛나는 내일을 살아내기 위해 마음에 담아본다. 빡빡하게 졸였던 마음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보기로 한다. 여름이 끝날 때가 되면 발등엔 샌들 모양에 맞춰 무늬가 그려질 것이다. 팔뚝엔 문신처럼 그어진 반소매 자국 위로 길어진 소매가 경계를 지울 것이다. 계절도 이처럼 몸에 흔적을 남기는데 오랜 세월 쌓아 온 일상의 흔적들이야 말해 뭐할까. 코로나 19가 지나고 난 후 내 마음에 새겨질 삶의 무늬는 어떻게 새겨질까 생각해 본다. 걸림돌일까 아니면 디딤돌일까.

한동안 ‘쟁이다’라는 동사가 일상에서 참 친숙했다. 모으다 보다는 좀 더 필사적 마음을 담아 마스크를 쟁이고 소독제와 휴지, 라면 등 생필품들을 무섭도록 빼곡하게 쟁였었다. 염려와 두려움 속에서 최소한의 안심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의 무늬들이 빚어낸 것은 아니었을까. 태양이 만들어 낸 무늬와 경계를 흐뭇하게 바라보듯 살아 온 시간, 견뎌 낸 세월이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을 스스로 인정해 주는 건 어떨까. 물론 마음의 무늬도 함께 말이다. 어쩔 수 없이 쟁인 것들로 ‘한 때, 잘 지나왔구나!’라고 생각하며. 쟁여서 소용없는 것이 있다면 마음의 영역이 아닐까 한다. 오늘 드러내지 못한 위로와 사랑, 표현하지 못한 감사의 마음은 내일이면 사라지고 말인지도 모를 일이다. ‘청소를 안 하면 새로운 우주가 생긴다’라는 말이 있지만, 음식물쓰레기를 하루라도 버리지 않고 집안에 쟁여놓으면 벌레가 슬어 부패하는 것처럼 마음에도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마음이라는 것이 자고 나면 금세 달라지기 마련이고 보면 말이다.

‘생각은 하기 나름이고 마음은 먹기 나름, 희망은 품기 나름’이라는데……. 오늘이 가기 전에 잘 쓰는 것 어떨까. 미처 다 쓰지 못하고 놓쳐버린 마음은 없나 뒤적여 보는 여름밤이다. “(...)/ 움직이는 것들은 세상을 가만히 놔두지 않네./ 바람도, 비도, 생각도….// (...)//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으면 다 보이네. 바람도 비도 새도 찰나의 생각까지도. 움직이는 것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세상 모든 것. 물무늬 지는 노을빛 하늘, 또는 소리의 향기까지도” 고인이 된 박찬 시인의 시 ‘식물이 되어 바라보다’의 일부다. 네 시부터 여섯 시까지 두 시간 남짓, 절정을 이룬 후 태양의 일부를 갉아먹은 2020년대의 마지막 일식이 돌아갔지만 나는 옥상에 그대로 남아 어둑해져 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10년 뒤에나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오늘의 달은 떠났다. 이 시의 한 문장처럼 ‘움직이는 것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세상 모든 것’ 이란 구절을 마음에 슬어 넣는다. 물무늬 지는 노을빛 하늘,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보랏빛의 가지꽃,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여름날의 저녁 공기와 그 속에 섞여드는 그리움과 외로움까지…. 그 곳에 서서 저녁이 번지는 것을 지켜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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