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이 필요한 화해와 치유
정치권이 필요한 화해와 치유
  • 승인 2020.08.1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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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광
대구경북소비자연맹 정책실장·경제학박사


조선시대의 사화를 연상시키는 ‘파묘법’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파묘법이란 친일파로 분류된 인사의 현충원 안장을 막고, 이미 안정된 경우 강제로 이장할 수 있게 하는 ‘국립묘지법 개정안’을 말한다. 이 논쟁의 발단은 김홍걸 의원이 제기한 ‘친일파 파묘법’이며, 특히 지난 8·15광복절 기념식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의 기념사가 논쟁에 기름을 부었다. 김 회장은 기념사에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지칭하여 뜬금없이 “이승만은 친일파와 결탁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국민이 애창하고 있는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 선생에 대해서도 “민족 반역자가 작곡한 노래를 국가로 정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나라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사실상 애국가를 폐기해야 한다고 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준비한 원고를 제쳐두고 즉석 연설을 통해 “역사의 한 시기에 이편 저편을 나눠서 하나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단죄받아야 한다는 그런 시각으로 역사를 조각내고 국민을 편가르기 하는데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원 지사는 광복절 경축식에는 “6·25 참전 용사나 유족, 강정 해군기지 기동단장, 해병대 여단장 등 목숨 걸고 대한민국 안보를 지키는 분들 앞에서 김 회장의 모욕적인 경축사가 나오는 것을 도저히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원 지사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 입대했는냐, 어떤 작품을 남겼느냐 등으로 친일 여부를 가르는 데 대해 “폭력적인 역사관이자 인간에 대한 오만”이라고 하면서 “친일파 재산 몰수와 같은 보훈 작업은 균형적·통합적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문제”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족 간 그리고 세대 간 존재하는 모순을 조우석의 저서 <박정희 한국의 탄생>에서 국산라디오 제1호를 설계했던 엔지니어 김해수와 그의 딸 김진주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경남 하동 출신인 김해수는 일제시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형님을 따라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고공에서 공부했으며, 광산에서 기술자로 근무하다 광복후 부산 연지동의 금성사에서 진공판 라디오 설계기술자로 근무하다 박정희와 두 번의 인연을 맺었다. 1961년 가을 박정희 의장이 방문해 부품가공실, 라디오 조립실과 검사실까지 두루 안내를 했으며, 그리고 7년 후 금성사 동래공장을 세우고 국산 TV 수상기 제1호 VD-191을 생산할 무렵,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한 박정희 앞에서 브리핑을 했으며, 그후 산업화 시대 역군으로 경제성장에 큰일을 했다.

반면 1955년생인 그의 딸 김진주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뒤 백병원에 근무할 때 <노동의 새벽>의 시인으로 유명한 연하남 박노해를 만났다. 부모는 금쪽 같은 딸이 고졸출신인 노동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조리 있는 말투에 예의바른 청년과의 결혼을 승낙했다. 부부인 딸과 사위는 노동운동에 헌신한다며 위장 취업했고, 1987년 민주화항쟁에 참여해 한몫을 했지만 1991년 봄에 발생한 사노맹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투옥되었다.

박정희와의 만남 뒤 전화기와 콘덴서 개발을 포함한 전자공업 분야에서 성공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 김해수도 딸이나 사위 입장에서 보면 자본가의 하수인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1980년대 이후 펼쳐졌던 우리 사회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 갈등의 한 모습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산업화와 민주화의 충돌 속에서 적지 않은 몸살을 앓아야 했다.

친일파 논쟁이 불편한 이유는 뭘까? 정국이 어려울 때 정국 돌파용으로 애용(?)하는 것도 있지만, 실줄과 날줄로 엮어 있는 복잡한 역사를 단순하게 재단하려는 가벼움 때문이다. 김대중 후보가 DJP연합을 통해 정권 창출하면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정치적 화해는 이미 선언했다. 그리고 사회 곳곳에서 화해와 치유를 강조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 친일파와 같은 역사논쟁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가 너무 어려운 역사를 붙들고 쉽게 말하고 도를 넘는 비판은 지식인 사회를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제 정치권은 정치적인 수사로 화해와 치유를 얘기하지 말고 진중하게 실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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