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지고
감꽃 지고
  • 승인 2020.09.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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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창문 사이로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이 보인다. 푸릇푸릇, 풋내 나는 속을 달래가며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떨떠름하던 땡감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말랑말랑하고 유순해진 홍시로 익어가고 있다.

떫고 여물지 않은 속내 모두 잘 삭혀 내려놓은 듯. 홍시 한 알 될 때까지의 과정이 삶의 여정과 닮아있다. 손끝만 살짝 갖다 대도 손톱자국 선명하게 새겨지던 여린 잎처럼 조그만 일에도 삭히지 못하고 생채기 내던 봄날이 있었다. 연록에서 진록으로 선명해지고 두터워지던 어느 날 감꽃 피우던 여름 지나 마당 가, 감나무 아래 떨어진 감꽃을 타래타래 엮어 목걸이를 만들던 추억 하나쯤 누구에게나 있을 성싶은 가을이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라더니 감꽃 피던 시절 또한 이내 지고 다시 감이 열렸다.

비어있는 허공 가득, 오래 매달리기 선수처럼 가지마다 부여잡고 있는 감들의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본다. 지난해, 병충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토양이 나빠진 것도 아닌데 감이 영 달리지 않은 적이 있다. 뭔가 큰 상처라도 준 양 감나무에 미안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른 사람의 몸처럼 감나무도 한 해 한 해 몸이 예전 같지 않았는지 해거리를 앓았었다. 주름지고 부스럼이 나돋아 군데군데 곰팡이인 듯 하얗게 곶까지가 피었다. 정성스레 약도 챙겨 먹이고 온 마음을 쏟았지만 돌보는 주인의 마음 따윈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시름시름 시들어 갔다.

해거리를 잘 견뎌낸 탓이었을까. 올해는 상처 하나 없이 튼실한 열매를 가지가 부러질 만큼 주렁주렁 매달았다. 지난해 애태우던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걸까.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속도를 가하고 재충전에 온 힘을 쏟았을 것이다. 푸른 감들이 허투루 떨어지는 것 하나 없이 홍시가 될 때까지, 오롯이 꽃과 열매 맺기를 포기하지 않고 버텨냈을 것이다. 쉼 없이 달려온 길, 지치고 고단했던 뿌리와 가지들을 스스로 거두어 치료함으로써 더없이 풍성하고 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생각난다. 오랜 삶의 경험을 통해 그 말을 믿고 의지할 때가 많다. 무엇이든 풍족한 동네에서 사는 우리들 삶의 만족도 또한 무진장 늘어날 것처럼 보이지만 삶에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 얻으면 또 하나를 잃기도 하고 다 가진 것처럼 보여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빈 곳이 많은 게 삶이다. 일상이 무너지고 무기력한 날들이 늘어날수록 해거리를 견딘 감나무처럼 살아내고 싶다. 나의 ‘해거리’는 복잡다단한 삶의 와중에 깊은 성찰과 넓은 안목의 뿌리를 다지고 울창한 감나무 잎처럼 넓어지는 상상의 공간으로 탈바꿈 시켜 줄 것으로 믿는다. 꽃이 지고 나면 끝인 줄 알았다. 그 끝이 다시 열매 맺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걸 뒤늦게야 안다. 추분이 지나면서 낮에 비해 밤이 길다. 터널을 지나듯 길어진 어둠 속에서 감은 익어갈 것이다. 껍질을 한 겹 벗어던진 감이 가벼워진다. 감 타래에 걸리거나 꿀단지나 책과 나란히 시렁에 매달리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쨍한 가을 햇살과 선선한 갈바람에 달콤하고 쫀득해진다. 분이 넘치는 달콤한 곶감으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때론 홍시로 완성되는 감이 있는가 하면 까마득한 가지 끝에 홀로 매달려 까치밥이 되기도 한다. 더러는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지 못하고 바닥이나 계단으로 뛰어내려 오가는 사람들의 발을 적시기도 하고 옷이나 바짓가랑이에 눌어붙어 감물이 들기도 한다. 한 번 배인 감물은 지워지지 않는다. 태어나면 다시 물릴 수 없는 인생처럼.

마당 한켠 담벼락에 기대고 선 감나무보다 더 길게 덧댄 대나무 장대로 잘 익은 감 몇 알을 딴다. 딴 감을 가족들에게 내어놓는다. 코로나로 인해 떨떠름하던 일상에 달짝지근한 감물이 베인다. 내가 쓴 졸시 ‘노을을 익히다’의 일부분을 나지막이 읊어본다. 공중에 매달려/ (…)/ 갓길 없는 생,/(…) / 온몸으로 하늘을 인 채/ 허공에 띄운 등화(燈火)가 되어/ 노을을 끌어안고 둥글게 늙어갈/ 붉은 신호 보내고 있다

우린 모두 해거리를 견디고 선, 한 그루 감나무다. 감물 들 듯 노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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