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페라가모가 뭐라고
[백정우의 줌인아웃]페라가모가 뭐라고
  • 백정우
  • 승인 2021.04.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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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7년만의외출스틸컷
영화 ‘7년만의 외출’스틸컷.

가족을 여름 휴가지로 보낸 출판사 편집자 리처드는 위층에 이사 온 매력적인 여인 즉 마릴린 먼로에게 저녁식사와 영화 관람을 제안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두 사람이 걸어갈 때 지하철 통풍구 위로 바람이 불자 먼로의 치마가 훌러덩 올라간다.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이 장면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5년 작 ‘7년만의 외출’이다. 영화에선 두 번 치마가 올라가고 그때마다 통풍구에 딛고 선 먼로의 발을 보여준다. 먼로가 신고 있는 하얀 페라가모 구두를.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주인공은 생태탕과 페라가모였다. 정책대결 대신 흑색선전만 난무한 선거운동을 보는 유권자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대체 페라가모가 뭐라고? 그렇지 않다. 유사 이래로 구두는 무척 정치적이었다.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제화공은 유럽의 19세기 변혁을 주도한 혁신적 직업군이었다. 예컨대 미국 독립선언문의 기초를 만든 이들 중 로저 셔먼은 제화공 출신이었다. 안데르센의 아버지도, 링컨의 아버지도 제화공이었다. 유독 제화공이 정치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19세기 유럽의 작업장엔 ‘읽어주는 소년’이 있었다. 다른 공방 장인들이 작업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귀담아 듣지 않았던데 반해 제화공들은 열심히 들었고, 직업상 각지를 이동하면서 새로운 문물을 학습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이런 제화공들 중에 20세기 초 미국으로 건너간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있었다.

나폴리에서 제화기술을 배운 페라가모가 처음 도착한 곳은 보스턴의 구두공장이었으나, 이내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영화사에서 영화소품을 담당한다. 가장 편안한 신발을 만들겠다는 집념으로 야간UCLA에서 인체공학을 공부한 그는 인간의 발을 가장 편안하게 받쳐주는 구두를 만들게 된다. “디자인은 흉내 낼 수 있어도, 그 편안함까지 모방할 순 없다.”는 페라가모 신화의 시작이다. ‘7년만의 외출’의 먼로가 신은 구두도, 그레타 가르보와 오드리 헵번과 소피아 로렌이 신은 것도 그리고 에바 페론이 가장 사랑한 구두도 페라가모의 솜씨였다.

페라가모보다 6년 먼저 미국에 정착해 보스턴 제화공장에서 일하던 중 살인강도 혐의로 법정에 섰고, 정치 신념 때문에 1927년 8월 사형대에 올라야했던 사코와 반젠티도 제화공이었다. 이쯤 되면 신발이 얼마나 정치적인 물건인지는 말 할 필요도 없다(2008년 부시에게 운동화를 던진, 2020년 문대통령에게 구두를 던진 사건은 차치하고라도).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페라가모는 다시 미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온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대량생산에 염증을 느꼈고, 장인정신을 펼치기엔 부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피렌체에 도제식 공방을 열고 실패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명품브랜드 살바토레 페라가모가 탄생한다. 구두란 인간이 두발을 딛고 땅 위에 설 수 있도록 발바닥 여린 살을 보호해주는 물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바닥에 관심 갖지 않을 때 페라가모와 제화공들은 발이 머무는 지점에 심혈을 기울였다.

보궐선거가 치러지는 배경만으로도 세상 부끄럽기 짝이 없는데, 그 제품을 신었느니, 장식 크기가 어떠니 따위로 갑론을박하는 걸 알면 페라가모가 무덤에서 나올 일이다. 아니, 사코와 반젠티까지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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