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봉화백(奉化伯) 정도전
[대구논단] 봉화백(奉化伯) 정도전
  • 승인 2022.12.29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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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환 전 경산시교육장
정도전의 호는 삼봉이다. 정도전의 고조할아버지 정공미는 봉화 정씨의 시조로 봉화현의 호장(戶長))이었다

정도전은 봉화를 떠나 영주 등지에서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영주에서는 정도전을 영주사람이라고 한다. 경기도 평택에서는 정도전의 아들 옆에 정도전의 가묘가 있어 ‘정도전 기념관’을 짓고 홍보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에서는 정도전이 단양 ‘도담 삼봉’의 경치를 사랑하여 호를 삼봉이라 했다고, 정도전과 연을 강조한다.

저마다 정도전과 관계 지어 스토리텔링을 개발하여 관광 인프라로 활용하고 있다. 관광 산업 시대가 초래한 선의의 경쟁이라 할 수 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은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정비하여, 조선 500년 역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정도전은 주자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조선 500년 국가 운영의 기본이 되는 ‘조선경국전’을 펴냈다. 조선은 이성계의 나라이자 정도전의 나라였다.

정도전은 재상 중심정치를 주장했다. 재상 중심정치는 ‘왕은 세습되기 때문에 현명하지 못한 왕이 나올 수 있다. 때문에 왕의 권력은 제한되어야 한다. 왕은 국가를 상징하고, 실제 권력은 재상이 행사해야 한다’ (JTBC인문학 강의, 이익주) 정도전의 재상 중심정치는 맹자의 정치철학과 일맥상통하고 민본 정치로 가는 길(MBC인문학 강의, 도올 김용옥)이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 이념은 그를 몰락의 길로 가져왔다. 강력한 왕권 정치를 강조하는 이방원의 벽에 부딪힌 것이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정치는 일본의 막부정치와 뜻을 같이하는 면이 있다. 일본은 국가를 대표하는 왕과, 실질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막부’가 있다. 이른바 막번 체제라 한다. 지금도 일본은 왕은 일본 왕실을 대표하고 정치는 내각 총리가 책임지고 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이 선포되고 40년 만에 서구 열강의 대열에 올랐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는 ‘갑오경장’을 하였으나 실패했고 중국 역시 서양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일본의 성공을 메이지유신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본에는 일본 발전의 토대를 이룬 3대 영웅, 쇼군이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오다는 일본 통일의 기초를 다졌고 그리스도교를 장려했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의 주범이지만 일본 통일을 완수하였다. 그의 야망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인도, 필리핀까지 점령하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몽상이지만 그런 꿈을 꿀 수 있는 당시의 일본 국력을 가늠할 수는 있다. 도요토미가 죽자 도쿠가와가 통일 일본을 안정시키며 에도시대를 열었다. 에도시대는 서구의 르네상스나 대항해시대에 버금가는 축적의 시대였다(일본史. 신상목)

메이지유신 후 재빨리 일본이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사실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전, 막번 체제에서 서양 문물을 나의 것으로 소화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도시대의 막부는 각 번(藩)에 어느 정도 자율권을 두어 번(藩)에 따라 난학(네덜란드) 등을 받아들여 서양 문화에 깨어있었다. 상하수도 시설과 도시기반시설이 갖추어진 동경은 이때 인구 100만으로 세계 최대 도시였다(조선일보). 에도시대는 일본 근대화의 ‘마중물’이었고, ‘가교의 시기’였다. 삼성에서는 일본기업을 이기기 위해서 에도시대를 자세히 기술한 소설 ‘대망’을 읽도록 사원들에게 권장하기도 하였다.

일본 정치체제가 우리나라처럼 왕권 중심 체제였다면, 일본의 근세는 화려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막번 체제의 쇼군은 일본 내 270여 번의 다이묘들이 치열한 경쟁과 격렬한 전쟁을 거쳐 패권을 잡은 사람이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략, 결단력, 강력한 리더십을 갖추어야 한다. 이는 능력을 갖춘 자가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맹자와 정도전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조선이 정도전의 재상 중심정치를 실현하였다면, 조선의 정치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조선의 정치는 진영과 당파의 싸움이었다. 물론 진영과 당파의 정치가 꼭 나쁜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수준 미달의 임금이 왕권에 집착하여 요령을 부릴 때, 당파의 생각이나 사상이 객관적 사실과 가치를 벗어나 망상과 파멸을 불러 왔다. 당파의 성리학자들이 군주를 가볍게 보고 서로가 서로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환국과 사화를 거듭하여, 조선은 퇴로의 길을 걸은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사상을 지키기 위해, 거짓과 잔꾀와 임기응변으로 다른 이의 판단을 매장하는 것이 통용된다면, 그건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이 된다. 역사는 오늘이고 미래이다. 오늘의 선택이 중요함이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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