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편지, 집전화, 휴대폰의 사랑방식
<대구논단>편지, 집전화, 휴대폰의 사랑방식
  • 승인 2010.11.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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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대구대 교수

당혹감이 확 몰려왔다. 옆에다 일단 `의(儀)’부터 적었다. 그리고 기억을 찬찬히 더듬으며 허공에 몇 번을 연습하고 나서야 부(賻)를 그려냈다. 상주께 위로를 전하고 다른 조문객들과 어울려 한참이 지난 후에도 당혹감은 가시지 않았다. 바닥에 검지가 `賻’자를 연거푸 연습하고 있었다.

연필로 한자를 직접 써본 게 언젠지 아득하다. 대부분 글을 컴퓨터로 작성하기 때문에 한글을 먼저 치고 한자 키를 눌러 선택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읽는 데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한자를 직접 쓰려면 그리고 있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런 경우는 한자뿐만이 아니다. 내비게이션을 2~3년 사용하면 어느새 길치가 된다고 한다.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전화번호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런 문명의 이기들을 만들고 사용한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반대로 이런 물건들이 우리를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만들어간다는 사실도 함께 알아야 한다. 휴대폰의 보급은 숫자 기억력이 떨어지는 엄지 족을 등장시켰고, 내비게이션은 약속장소를 기가 막히게 잘 찾아가는 길치들을 양산했다. 컴퓨터는 편집기술이 뛰어난 졸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문명의 이기가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은 엄지나 기억력, 필체 정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생활양식 그리고 소중한 가치가 조그마한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변화되는 것을 보면 놀랍다 못해 섬뜩해진다.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편지가 사랑의 길을 열어주었던 시절이 있었다. 밤새 긴 편지를 몇 번이고 고쳐 쓰고, 그리고 다시 쓰고, 동녘이 터올 때 읽어보곤 찢어버리는 경험은 그 시절 사랑을 앓아본 사람이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편지는 쓰는 이의 감정과 생각을 개념적으로 규정하고 상관관계를 논리화하도록 요구한다.

좋아한다고 해야 할지 사랑한다고 써야 할지, 아니면 그냥 호감을 표현해야 할지 개념적 선택의 기로에 내몰린다. 그래서 쓰고 고치는 연속된 작업에 빠진다, 밤을 하얗게 새면서 …. 그리고 나서도 빨간 우체통 곁에 안절부절 서서 배달부를 기다리며 이미 봉해 넣은 편지를 다시 고치려는 청춘남녀들을 가끔씩 보기도 했던 것이다.

집전화가 소통의 대로가 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새하얀 종이에 또박또박 적어 보내고 또 받으면 몇 번씩 읽고 보관되는 편지와 비교하면 입에서 나오는 말은 표현의 신중함이나 심각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집 전화는 다른 것을 요구했다. 여름이면 대청마루에 겨울이면 안방에 자리를 잡는 집 전화는 누가 받을지 모르고, 가족이 어느 정도 통화내용을 들을 수 있다. 전화 거는 사람은 자기가 누구며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공개되어도 좋은지를 먼저 결정하도록 요구되었다. 용기가 필요했다.

휴대폰은 사랑을 다른 길로 이끌어 갔다. 옛날 소통에 따랐던 고민이나 용기는 거의 사라졌다.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환경을 제공하면서 휴대폰은 통화의 편의를 극대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 편리함의 이면에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도 함께 있다. 고민과 용기가 필요치 않는 소통은 인간관계를 가볍게 만든다. 쉽게 사귀고 쉽게 헤어지는 오늘날의 사랑관계는 어쩌면 휴대폰의 편리함이 초래하는 삶의 가벼움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소통수단의 발달이 편의를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편의가 우리의 삶에 무엇을 의미하게 되는지는 다른 문제다. 쉽게 말을 건넬 수 있고, 그 말을 흘려들을 수 있는 소통의 방식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항상 효과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한 친구는 돈에 쪼들리면 부모님께 전화대신 편지를 썼다.

애절한 편지를 써서 부치는데 시간이 훨씬 더 걸리지만, 오히려 그것이 확률적으로 더 빨리 더 큰 금액으로 회신된다는 이유였다. 전화보다 편지가 빠르다는 이 역설은 단순한 편리를 넘어 신중한 선택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끝나가는 것으로 알았던 불법사찰 문제가 `대포폰’이 불쑥 등장하여 재 점화되고 있다. 소통수단의 변화가 소통의 방식과 내용, 나아가 인간관계와 사회도 바꿔가는 사실을 생각하면, `대포폰’의 영향이 자못 궁금하다. 공문이나 전화, 휴대폰이 아니라 `대포폰’으로 전달해야하는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의 민주사회를 어떻게 변형시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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