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금호강 풍광 화폭에 담아 시 한 수…‘뱃놀이 가잔다~’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금호강 풍광 화폭에 담아 시 한 수…‘뱃놀이 가잔다~’
  • 김종현
  • 승인 2023.05.10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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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선유풍류(船遊風流)로 동주의식(同舟意識) 함양
1607년 안동부사 임명된 한강 선생
마음 비우고자 과거 임지 함안 찾아
34명 모여 창녕우포 향해 뱃놀이
‘용화산하동범록’ 만들어 기록 남겨
놀이 통해 화목·결속 다진 선유문화
조선시대 서민들은 삼복더위에
매운탕·어죽 먹어가며 뱃놀이 즐겨
윤택한 선비들은 악공·기녀 가무 즐겨
금호선유풍류도
금호선유 풍류도 그림 이대영

◇용화선유, 봉산욕행 그리고 개진선유

이렇게 많은 누정에서 요산요수풍류를 통해 금호강을 중심으로 한 한려학파의 ‘(같은 배를 탔으니) 우리가 남이가?’하는 ‘동주의식(同舟意識)’이 함양됐다. 동주의식을 함양하는 대표적인 사례로는 ‘용화선유(龍華船遊)’,‘봉산욕행(蓬山浴行)’ 그리고‘개진선유(開津船遊)’를 빼놓을 수 없다.

용화선유에 대해 박상절(朴尙節, 1700~ 1774)은 8폭 선유도에다가 5언 절구의 시화병풍을 ‘용화산 아래에서 다 함께 배 띄우는 그림(龍華山下同泛之圖)’이라고 했다. 5언 절구가 8폭에다가 1) 용화악 2) 청송사 3) 도흥보 4) 내내촌 5) 경양대 6) 시우포 7) 평사면 8) 창암사의 그림과 시문이 36cm와 79cm로 표구되어 있었다. 시대적 배경은 1586년부터 1588년까지 함안군수를 역임하면서 ‘함주지(咸州志)’를 저술했던 한강 정구선생이 1607년 정월 27일 함안대산 남지 창암정(滄巖亭)에서 여헌 장현광,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일박을 하면서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강 선생은 1607년 1월 13일자로 안동부사로 임명되었다. 사직상소를 하느냐 등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해서 마음을 비우고자 과거 임지 함안을 찾았다. 그곳에 34명이 모여 큰 배를 타고 창녕우포를 향해 십리 길 뱃놀이를 했다. 여흥을 위해 술과 안주를 배에 싣고 뒤따랐다. 이명호 선비가 붓을 들어 기록하고, 곽재우, 박충후, 여헌 장현광 순으로 이름을 적고 그다음부터는 연장자순으로 성명을 기록했다. 한강이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이라고 서책제호를 적었다. 같은 2부를 만들어 1부는 한강 선생, 1부는 안정이 갖고 갔다. 14년 후에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 1585~ 1664, 趙植의 아들)가 이를 보고 책을 만들어 두었다. 1621(광해군13)년에 그 서책을 기반으로 ‘용화산하동범록’을 만들었다. 그해에 화공에게 의뢰하여 선유도 8폭 병풍과 두루마리 그림을 제작했다. 140여 년이 지난 1744년 박진영 장군의 증손자 박상절이 간송당 조임도의 현손(玄孫) 조홍엽을 찾아가 병풍과 두루마리를 보고 시대적 배경과 산수풍경을 가미해 ‘용화산하동범지도의 8폭 그림과 오언절구 1수씩 한시를 끼워 넣었다. 오랫동안 영남유림에 인구회자하였기에 1620년 조임도의 ‘용화산하동범록후서’란 글을 통해 영남유림에 새로운 기풍을 조성했다. 1758(영조34)년 박상절의 개인적 문집 ‘기낙편방(沂洛編芳)’을 편찬하는데 핵심사례가 되었다.

◇한려학파와 광주이씨 칠곡(팔거)파 융성

먼저, 속칭 광주이씨 칠곡파에 대해서 언급하면 이극견은, 첨지중추원사를 역임하신 이예손의 둘째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성주목사를 거쳐 통례원 좌통례를 역임했다. 1504(연산군10)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국왕의 시중을 들고 있던 종반 이숙질 등이 비참하게 화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처갓집이 있는 전북 옥구군(오늘날 군산시 옥구읍)으로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성주목사로 부임할 때에 둘째 아들 이지를 책방 도령으로 팔거현(오늘날 칠곡)에까지 데리고 왔으며, 이곳에서 최하의 딸과 혼인시켰다.

다시 한양에 내직인 통례원좌통례로 발령이 나자 아들 내외는 팔거현에 세거하게 되어 곧이어 갑자사화 등의 연산혼조가 극에 달했음에도, 그들은 팔거(칠곡)에 무사히 피신했다. 이지의 현손 이윤우는 한강정구의 문하로 인조 때 공조참의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 이도장은 한강과 여헌의 문하생으로 양관대제학에 올랐다. 이도장의 장남 이원정은 이조판서, 차남 이원록은 대사헌에 등극했다. 한편, 이원정의 장남 이담명은 이조참판과 경상감사를 했다. 차남 이한명(1651~ 몰년미상)은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여 사대한림을 거친 명문대가로 광주이씨 칠곡파를 형성했다. 오늘날 지천, 석전, 매원, 심천 등지에 1,500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봉산욕행록을 통한 동주의식(同舟意識)

한강 정구 선생이 1617년 신병 치료를 위해 부산 동래 온천욕을 다녀오는데, 제자였던 이윤우가 제자동행으로 학문연찬의 계기를 마련했다. 그 과정을 통해 동주의식(同舟意識) 혹은 학문여행(study tour)을 기록으로 남겼다.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은 1617년 7월 20일부터 같은 해 9월 4일까지 45일간의 일기다. 당시 한강 선생의 나이는 75세로 3년 후에 별세했다. 이 기록물은 1912년에 정제기가 목판본으로 다시 간행하여 알려지게 되었다. 서지학상 특징을 살펴보면 목판본 1책, 크기는 20.3cm × 29.2cm,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 중이다. 수행 문인과 내방 문인으로는 경상감사, 연로한 지방관, 영접을 위해 내방 했던 사림, 동래 읍민 등 300여 명의 이름이 등록되었다. 한강 문하생으로 실명확인은 80여 명이다.

당시도 다수인원 동시 이동에 가장 선호했던 교통수단은 배편이었다. 따라서 동주의식의 함양이란 부산물이 창출되었다. 45일간 문하생의 규율이 엄격하게 작동되었고, 당일업무 추진을 위해 실무자를 정했고, 전체일정을 모두 소화하는데 일사불란했다. 영남사림의 맹주의식(盟主意識)을 천명함과 동시에 후학고제(後學高弟)를 설정함에도 자연스러운 기회가 되었다.

7월 20일 선박편으로 출발 신호탄을 올리면서 칠곡, 하빈, 고령을 지나,창녕, 영산, 함안, 칠원, 밀양, 김해, 양산을 거쳐, 7월 26일 정오에 동래온정에 도착했다. 8월 26일 온정욕을 마치기까지 한 달을 온정에서 머물면서 동래부사 황여일은 사전에 정갈한 가옥을 마련하는 등 일행 맞이할 준비를 다했다. 지방관리 혹은 선비들도 극진한 예우를 위해 뒤따랐다.

봉산욕행록 7월 26일자 기록을 읽어보면 :“정오에 온정의 욕소에 도착하였다. 동래 사는 사람들은 이미 지난봄에 선생께서 이곳에 와서 목욕하실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2실(室) 1청(廳)의 초옥(草屋)을 별도로 건립하였는데 매우 정결했다. 지금 선생을 따라오는 자들이 많은 것을 알고는 다시 임시 가옥 2칸을 지어 제자들이 거처할 곳으로 정해 주었다. 그 정성을 족히 알 수 있었다.” 이어 “온정에는 내외에 석감(石龕, 돌 욕조)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왕이 만든 것이라 했다. 욕조 하나에 5~ 6명씩 들어갈 수 있고, 석공(石孔) 위에서 물이 흘러나오는데, 그 물이 매우 뜨거워 손과 발을 함부로 담글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 선비들 선유문화 더듬어 보면

놀이를 통해 화목과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선유문화는 유교문화의 극치였다. 고려사에선 궁중에서 오락으로 수희(水戱) 혹은 주유(舟遊)라고 표기했다. 조선시대 삼복더위에 배를 타고 매운탕 혹은 어죽을 먹어가면서 서민들도 뱃놀이를 즐겼다. 주변 풍광을 감상하면서 흥취에 즉흥시도 읊었으며, 윤택한 선비들은 악공이나 기녀들의 가무까지 금상첨화해 탐닉했다. 1082년 송나라 소동파가 적벽 뱃놀이를 읊었던 ‘적벽부(赤壁賦)’ 칠월기망(七月旣望, 7월 16일)을 조선 선비들이 벤치마킹했다. 칠월기망 ‘뱃놀이 날(船遊日)’ 인기가 대단했다. 대표적으로 평양의 홍양호는 중원절(中元節, 7월 15일) 밤에 대동강 선유를 한 ‘부벽루감고사(浮碧樓感古事)’를 시로 남겼다. 19세기 한양의 김무숙은 칠월기망에 한강 선유를 ‘무숙이타령(일명, 曰者打令)’으로, 안동하회 선비들도 매년 칠월기망에 낙동강 선유를 즐겼으며 강안문학을 남겼다.

안동 선비들의 선유를 살펴보면, 분강(汾江, 오늘날 汾江書院) 위에 있는 애일당(愛日堂)을 거점으로 i) 농암 이현보와 ii) 퇴계 이황이 16세기 중반의 선유를, 17세기 초 iii) 안동부사 김륵과 iv) 권기 등 유림이 주도했다. 병오선유 때는 악공을 동반한 안동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기록을 남겼다. 1763년 4월 4일 임청각에서 강호자연을 벗하고 학문을 즐겼던 허주 이종악이 4월 8일까지 약산 반구정까지 뱃놀이했던 선유도를 ‘허주부군산수유첩’이라는 화첩에 남겼다.

글 =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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