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역지사지
  • 여인호
  • 승인 2023.10.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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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해가 없도록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녹음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대로(가명) 어머니, 오늘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학교에서는 교감선생님과 담임선생님도 참석하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나대로도 이야기 도중에 잠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자리는 나대로에 대해서 좀 더 잘 알아보기 위한 자리입니다. 나무라거나 누구를 탓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사실 학교에서는 나대로의 가정생활을 잘 알지 못합니다. 어머니께서도 나대로의 학교생활을 정확히 알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대로의 학교생활을 가감 없이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께서도 나대로의 가정생활을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자리로 부족하면 다음에 또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리고….”

2019년 A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나대로, 저말고(가명), 너조차(가명)는 같은 반 아이였습니다. 세 명은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매우 활발했습니다. 아침에는 영호와 함께하는 맨발축구의 단골손님이기도 했습니다. 쉬는 시간은 대부분 같이 어울려 다녔습니다. 공부시간에는 적극적인 학습방해와 소극적인 학습방해를 절묘하게 구사하기도 했습니다. 학력은 기초학력을 넘나들어서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욕도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특히 나대로의 욕은영호가 들어도 기가 잘 노릇이었습니다. 나대로는 어머니가 재혼해서 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형과 누나가 있었습니다. 저말고는 부모가 이혼해서 아버지와 할머니와 살았습니다. 너조차는 부모님이 계시고 형은 같은 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영호는 A학교에서도 일 년에 모든 학반에서 네 시간씩의 수업을 했습니다. 첫 수업에 들어가니 저말고가 “저는 교장선생님하고 수업하기 싫어요.”라고 했습니다. 욱 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러면 이번 시간에는 너 혼자 공부하도록 해.”하고 수업을 했습니다. 나대로와 너조차도 수업 분위기를 자꾸 흐렸습니다. 상관하지 않고 재미있게 수업을 하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말고가 “교장 선생님, 저도 하고 싶어요.”라고 합니다. 못 들은 척하고 계속 수업을 했습니다. 그렇게 첫 만남의 첫 수업을 마쳤습니다. 그 수업은 교감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참관을 했습니다. 담임선생님하고는 세 아이를 언제든지 교장실로 보내도 좋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해 세 아이는 50여 번 교장실에 왔습니다. 공부시간에는 학급에서 배우던 책과 공책을 가지고 와서 교장실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교장실의 사탕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영호는 세 아이에게 삼총사라는 멋진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나대로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두 번 면담을 했습니다. 어떤 날은 밤 9시가 지나서도 영호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나대로가 조금씩 변했습니다. 영호가 혀를 찼던 나대로의 욕의 비밀도 밝혀졌습니다. 나대로의 어머니는 재혼을 했습니다. 나대로의 새아버지는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노동력을 상실했습니다. 어머니가 직장에서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면 나대로의 새아버지가 그렇게나 심한 욕을 한다고 합니다. 그 욕이 나대로에게 그대로 투영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담임선생님과 나대로 어머니 두 분만 남았을 때 오간 이야기라고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긴 덕분입니다. 저말고의 아버지와 너조차의 어머니도 각각 한 번씩 면담을 했습니다. 삼총사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6개월을 A학교에서 근무하고 교대부초로 옮겼습니다. 지금은 중학생이 된 삼총사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학교가 힘이 든다고 합니다. 특히 초등학교가 매우 힘들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갈등이 심하다고 합니다. 정년퇴직을 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학교 이야기에 무척이나 민감합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자. 선생님은 학생의 입장이 되어보고, 학생도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학부모님도 선생님 입장이 되고, 선생님도 학부모 입장이 되어보면 좋겠습니다. 교장과 교감선생님은 선생님 입장이 되어보고, 선생님은 교장이나 교감선생님의 입장이 되어보며 좋겠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문제해결의 첫걸음이 아닐까요?



김영호<전 대구교육대학교대구부설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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