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에 서서 돌아보니 보여요. 염소들 데리고 한해살이풀로 살다 보니 단단하던 뿔이 빠지더라고요
가파른 피를 가진 족속이에요 높은 데 서려는 고집인 거죠 앙버티고 있으면 강퍅하다고 하지만 시류에 끌려가지 않는 발굽이 있으니까요
흑염소는 위엣 걸 먹어요 고개 쳐들고 발까지 들면서 아까시잎을 버들잎을 잘 잘 따 먹어요 뽕잎이면 뽕잎, 칡넝쿨이면 칡넝쿨, 남다른 먹성이 흑염소를 흑염소답게 하는 거죠
염소들과 비탈에 있으면 목숨의 한살이가 보여요 나고 자라 먹히고 사라지는 내가 보여요
◇염민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육과 졸업. 시집 ‘시라시’, ‘오늘을 여는 건 여기까지’ ‘새얼문학’, ‘인시협’ 회원. ‘해시’ 동인.
<해설> “비탈과 염소”, “염소와 한해살이풀인 나”가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것도 비탈을 사는 둘 사이는 단단해지는 뿔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뿔은 비탈을 좋아한다. 혹은 “비탈을 버티며 버둥거리고 산다”라는, 어떤 공식이 성립된다. 산비탈에 염소를 풀어놓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도 비탈은 마치 포탄을 맞은 것처럼 벌거숭이 비탈이 된다. 그러나 이듬해 끈질기게도 풀들은 자라나 다시 비탈을 메운다. 도심을 몰려다니는 인파도 흔들리는 풀 같아 보일 때가 있는 것처럼 염소를 풀어놓은 비탈 또한 시인의 눈에는 나고, 자라, 먹히고, 사라지는 그런 나를 비유적으로 들여다보는, 놀라운 깨달음의 장소가 되고 있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