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따라잡기] 윤석남 작가 개인전…대구미술관·선큰가든 31일까지
[전시 따라잡기] 윤석남 작가 개인전…대구미술관·선큰가든 31일까지
  • 황인옥
  • 승인 2023.12.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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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간 여성의 삶 주제 매진 ‘여성주의 미술 대모’
작년 이인성 미술상 수상 영광
40살 때 꿈꾸는 그림 공부 시작
가장 잘 아는 ‘자화상’으로 시작
이탈리아서 ‘어머니의 이야기’전
윤두서 자화상 ‘살아있음’ 발견
돌봄·생명·인간애 등 주제 확장
전시전경_대구미술관_윤석남1
윤석남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대구미술관 전시장 전경. 대구미술관 제공

성차별이 엄격했던 전근대적인 사회구조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억압과 차별은 일상이었고, 이로 인한 여성의 역할과 지위는 남성의 그것과 달랐다. 20세기 후반 이후 지금까지 여성의 지위가 꾸준하게 높아져 왔다고 하지만 여전히 차별은 곳곳에 잔존한다. 여성할당제로 오래된 차별의 역사를 메워보려는 시도는 남성 역차별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윤석남(84) 작가는 한국사회 여성의 삶과 현실을 여성주의 미술로 정립하며 한국 여성주의 미술을 개척하고 발전시켜온 장본인이다. 40여년간 올곧게 ‘여성’을 주제로 여성주의 미술에 매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이인성 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현재 대구미술관 2,3전시실과 선큰가든에서 한창인 그의 개인전은 ‘제23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전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한국 여성독립운동가를 다룬 채색 초상화, 나무로 유기견 1천25마리를 조각한 설치,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불안과 불편함을 내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핑크빛으로 형상화한 ‘핑크 룸’, 2001년에서 2003년까지 그림일기처럼 그린 수백 점의 드로잉 등 그의 작업세계 전반을 조망한다.

윤석남에게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는 수식어는 남성우월주의 시대의 정점을 지나온 여류 작가인 그에게는 훈장과도 같은 수식어다. 그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무엇을 그릴 것인가?”를 고민할 때 자신을 포함한 주변 여성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고, 외부의 시선을 의식 할 겨를도 없이 화폭에는 자신과 주변 그리고 역사 속의 여성들이 자리를 잡아갔다. 20세 중후반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산업화나 민주화, 이념과 같은 거창한 구호보다 그의 가슴통을 울린 것은 여성의 삶이었다. 그가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담론에 집중한 시간은 어림잡아 40여년이 넘는다.

“여성으로서 제가 가장 잘 아는 대상이 여성이었어요. 제가 저 세상으로 갈 때까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더 깊이 파고들 계획입니다.”

윤석남 하면 ‘여성주의 미술’로 주목받았지만, 첫 출발은 여성이라는 거대 담론보다 지엽적이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미술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여기에는 세상의 수많은 존재들 중에서 이해도가 가장 높은 대상을 찾았을 때, 자신을 떠올린 배경이 있다. “어떨 때 화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지를 가장 잘 아는 저를 그리자는 생각에 자화상을 그렸어요.”

정작 첫 개인전에선 자화상이 소개되지 못했다. 대신 친구들의 초상화 24점을 전시했다. 1982년의 일이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세상에다 대 놓고 하기에 낯가림이 있었고, 결국 자신만큼 잘 안다고 자부하는 친구들을 그렸다. “나의 친구들은 제가 백 번, 천 번을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대상이었고, 저 대신 친구들을 그리기로 결심했죠.”

친구들의 초상화로 전시를 꾸리고 나니 용기가 조금 생겼다. 자화상이 본격화 됐다. 당시 또 다른 여성이 등장하는데, 그의 어머니였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굴까?를 떠올렸을 때 친정어머니가 생각났다”고 회상했다. 가족을 위한 헌신의 상징으로 어머니가 보였던 것이다. 버려진 나무를 깎아 저고리와 치마를 그리며 어머니를 형상화했다.

“어머니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말하면서 어머니의 일생을 조명하고 싶었다”는 1993년의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은 ‘어머니의 눈’이라는 제목으로 전개됐다. 쓰던 빨래판, 낡은 의자 등 나무판의 독특한 질감에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을 아로새겼다. 작품은 1996년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특별전 ‘어머니의 이야기’전으로 이어졌다. 이후 자화상을 본격적으로 발표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희생의 상징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여인의 몸으로 남편 없이 6남매를 홀로 키워낸 여장부였다. 말이 쉽지 너 나할 것 없이 가난하던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6남매를 키운다는 것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윤석남이 성장하며 지켜본 어머니의 모습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헌신하는 존재였다. 윤석남에게 모진 세월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세상과 맞서며 자식들을 보석처럼 키워낸 위대한 존재로 어머니를 바라봤다.

윤석남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을 반추했다. “친정어머님은 당신보다 타인을 더 사랑하는 더 이해하는 삶을 사셨어요.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윤백남보다 무명인 어머니를 더 존경할 수밖에 없죠.”

화가 이전에 그는 문인을 꿈꾸었다. 한문책을 많이 보유했던 부친의 서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그는 책읽기의 재미를 알아갔다. 1923년 개봉된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연출한 영화감독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그의 예술적인 감수성은 일찍 영롱하게 빛이 났다. 하지만 문학가의 꿈은 일찍 접었다. 쟁쟁한 문인들 틈에서 존재감을 키워 갈 자신이 없었다. 결국 글쓰기를 접고, “글쓰기 다음으로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당시 문학만큼 좋아했던 그림이 자연스럽게 그의 의식 위로 떠올랐다.

화가의 원을 세웠지만 문제는 환경이었다. 여섯 형제들 틈에서 미술대학 진학은 신기루처럼 아련했다. 결국 주어진 환경에 순응했고, 미술대학 진학은 감행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화가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니어서, 막연했지만 “여유가 생기면 그림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가슴 깊숙한 곳에 고이 묻어뒀다. 그의 다짐은 결혼하고도 한참 지난 후에 실현됐다. 그의 나이 40살 때 그림 공부가 시작됐다.

“방 4개인 아파트로 이사 가면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미고 그림을 그리겠다고 생각했고, 여건이 조성됐을 때 바로 실행했어요.”

그가 젊었던 시절만 해도 남녀차별은 존재했다. 봉건시대와 비교하면 진전된 시대였지만 여전히 딸들에게 인색했다. 그 역시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한 이면에 딸이 가지는 자격지심이 있었다. 결혼 후에는 스스로 주부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여성 특유의 희생정신이 충만했다. 여성이었기에 미술공부는 계속해서 우선 순위에서 멀어졌고, 결국 불혹이 되어서야 붓을 들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을 비롯한 그 시대 여성들의 삶은 윤석남 미술의 핵심 주제인 여성주의적 서사를 지탱하는 지지대가 됐다.

그림에 대한 갈증의 시간은 유독 길었다. 그런 만큼 작가의 행보를 시작했을 때 거침없는 전력질주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림 그리기에 앞서 머뭇거렸다. “무엇을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에 대한 정립이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당시 그는 “내가 잘 아는 분야를 그리겠다”는 가닥 하나만 붙잡고 고뇌했다. 그의 두 손에 잡힌 것은 ‘자화상’이었다. “화가로써 이름을 알리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즐기면서 이어간다면 언젠간 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 있었다. 우직하게 여성주의적인 관점을 유지한 것은 첫 마음을 놓지 않았던 결과였다.

지난 40여년간 그의 ‘여성주의 미술’은 내용과 형식에서 깊이를 더해갔다. 작가 자신, 작가의 어머니, 여성독립운동가, 여성사회운동가 등 시대를 초월한 여성들로 대상을 확장했고, 한국화 기법의 초상화가 자리를 잡아갔다. 매체도 평면, 조각, 설치 등 다채롭게 구사했다.

“왜 한국화의 초상화였는지”에 대해 그는 조선후기 문인이자 화가였던 윤두서의 자화상과의 만남을 언급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조선의 초상화 200년 전에 걸린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얼굴 하나로 그의 모든 것이 표현돼 있었죠.” 윤두서의 자화상 앞에서 그는 호통 소리를 듣게 된다. “속은 텅 빈 채, 겉만 화려한 치장을 하고 있지 않느냐?”며 꾸짖는 윤두서의 목소리였다. 그에게는 한국회화를 무시하고 서양회화만 최고라고 여기던 당시의 사대주의적 행태에 대한 꾸짖음으로 들려왔다.

그날 이후 동양화풍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초상화는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려던 동양 회화의 정신을 화면에 충분히 수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동양화의 초상화는 섬세하고 생동감이 넘쳤어요. 섬세한 라인으로 얼굴을 그리고 눈동자만 찍으면 정말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것 같죠.”

그가 300여년 전 윤두서의 초상화에서 숨이 멎은 이유는 “살아있음”이었다. 윤두서의 초상화에서 배어 나오는 ‘시대를 초월한 선비정신’을 발견했고, 그것이야말로 그림에 영원성을 제공하는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윤두서의 초상화에서 받은 자극은 그의 미술에서도 실천적인 행위로 이어졌다. 그의 화면에도 생기가 자리를 잡아간 것. “단지 한지라는 종이일 뿐인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운이 윤두서의 초상화에 실려 있었어요. 저도 그런 기운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의 여성주의 운동은 여류 문인들과의 교류로 더 자극받고, 발전됐다. 어머니와 모성에 관한 자전적인 이야기는 정체성, 생명과 돌봄, 자연, 여성사 등의 주제로 확장돼 갔다. 특히 이번 전시에 걸린 역사 속 여성인 한국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초상화들에서 그의 여성주의는 정점을 달린다. 오랜 기간 그가 다뤄온 여성사라는 큰 주제 아래 투쟁과 헌신, 돌봄의 가치 등을 다양한 표현양식으로 조명한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에 남성 못지않은 열정과 희생정신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이름 없이 사라진 여성들의 존재를 그린 것은 그들이 무명의 희생자로 잊혀 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되는’ 존재로 복원시키고자 한 이유였어요.”

1천25마리의 유기견을 나무로 조각한 ‘1천25 사람과 사람 없이’에는 모성과 돌봄, 인간애까지 아우른다. 버려진 유기견을 보살피는 이애신 할머니의 사연을 우연히 접하고 그의 삶에서 받은 충격과 감동, 고마움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이다. 주제는 인간과 동물의 공존이다. 작가는 “인간의 이기심과 생명경시, 버림 문화에 대해 꼬집고, 동시에 그럼에도 결국 인간애와 돌봄, 생명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한다. 문학소녀 시절 내재됐던 그의 문학성은 2001년에서 2003년까지 제작한 수백 점의 드로잉에 되살아났다. 여성의 고단하지만 강인한 삶을 드로잉에 은유했다. 특히 드로잉의 제목이나 문학적 글귀는 짧지만 그의 사유를 핵심으로 꿰뚫는다. 전시는 31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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