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 아웃] 모두가 자기 인생의 스프린터
[백정우의 줌인 아웃] 모두가 자기 인생의 스프린터
  • 백정우
  • 승인 2024.02.0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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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프린터’ 스틸컷.

육상 100미터 경기. 스타트 라인에 선수가 들어서고, 출발 총성이 울리면 쏜살 같이 튀어나간다. 10초 안팎에 끝나는 승부다. 전광판에 순위와 기록이 새겨진다. 환호하는 승자와 고개 떨군 패자. 익숙한 육상경기장의 모습이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다. 그러니까 선수들이 어떻게 훈련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이겨내고 스타트라인에 섰는지는 아무도 관심 없다(당연한 일이겠지만). 비인기종목인 까닭에 선수 개인의 마땅한 정보도 없다. 그렇다고 해도 선수의 경기장 밖의 삶을 바라보는 카메라 하나쯤 있어도 좋지 않을까.

최승연 감독의 ‘스프린터’는 전성기가 지난 무소속 김현수와 육상부 해체를 앞둔 고등학교 3학년 이준서와 무릎 수술 후유증에 시달리는 랭킹 1위 이정호, 세 명의 100미터 선수의 이야기다. 김현수는 한 때 한국신기록 보유자였으나 지금은 4위에 머물러있다(딱 한 명만 제치면 되는데). 1학년 기록에서 멈춰버린 이준서는 육상부 해체와 코치의 정규직 발령이라는 딜레마에 빠졌다.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육상부는 해체될 것이지만, 육상부가 존속하면 코치는 정규직 교사발령이 불가능하다. 무릎 수술 통증완화를 위해 불법으로 스테로이드제를 주사하는 이정호는 어떡해서든 자리를 지켜야 한다. 현재 그는 부동의 랭킹 1위다.

영화는 국가대표예비선발전을 앞둔 세 명의 단거리 선수의 갈등과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마땅치 않은 훈련장과 불안한 환경과 아픈 다리를 가진 세 명의 결핍은 곧 누구나 인생에서 만나는 삶의 딜레마이다. 냉정한 현실 앞에서 갈등하거나, 내 열망을 위해 타인의 미래를 눈감거나, 불법으로라도 현재 위치를 지키고 싶은 욕심 같은 것 말이다. 모두의 목표는 같다. 방법이 다를 뿐이다.

감독이 주목하는 건 국가대표선발전도 순위도 기록도 아니다. 그래서 숫자에 집착하지 않는다. 즉 카메라는 선발전이 벌어지는 경기장의 긴장감과 선수들의 역동성을 포착하려 애쓰지 않는다. 영화는 승자의 포효도 패자의 아쉬움도 관심이 없다. 순위와 랩타임이 적힌 전광판도 스쳐지나갈 뿐이다. 카메라는 스타팅블록에 발을 얹는 순간 제 할일을 다 했다는 듯 무심히 뒤로 빠진다. 물론 승부는 가려졌고 순위도 나왔다. 10살 이상 차이 나는 후배들과 경쟁해 4위에 그친 김현수도, 간발의 3위로 태릉에 입촌하게 된 이준서도 모두 승자의 표정이다. 1위로 통과했지만 도핑테스트에서 금지약물 의심판정이 나온 이정호의 다음은 보여주지 않는다.

스프린터(sprinter)는 육상과 빙상의 단거리 선수를 일컫는 용어이면서 '전력질주하다'라는 뜻도 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의 스프린터이다. 최선을 다해 전력질주하며 살아간다. 결과의 차이는 생길지언정 스프린터가 아닌 삶은 없다. 김현수의 아쉬움이 말해주듯 내 앞에 딱 한 명을 넘어서는 게 너무 힘들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 그래서 영화는 경기 이후의 이야기가 없다. 김현수가 다시 도전을 할지, 이준서는 태극마크를 달았는지, 이정호의 도핑테스트는 어떻게 됐는지... 적어도 트랙에 서기까지 전력질주 한 스프린터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니까. 그러면 되었다는 얘기다.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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