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지 않았다. 햇살 꼿꼿했다.
대나무 우듬지 빈 방을 기웃대지 않았다.
등 굽은 기억들 손톱만큼도 간여하지 않았다.
심심한 시간이 제 민낯을 제 멋대로 들어냈을 것이었다.
<감상> 영상의 도움 없이 텍스트로만 시를 읽으면 어떤 상황도 어떤 이미지도 전혀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왜 이 시의 제목이 ‘낙서’인지도 알 길이 없을 테지요. 하지만 햇빛이 일상의 세간들 위에 창 밖 나무 그림자를 불규칙한 선들로 드리워놓고 있는 영상언어는 왜 이 시가 「낙서」인지 금방 눈치채게 해줍니다. 「낙서」는 “언어 예술이라는 기존 시의 범주를 확장하여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 예술”이라는 디카시의 사전적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따금 들르는 내 시골집 서재 풍경입니다. 책과 탁자와 이불과 아침 햇살이 기약없이 오래, 주인을 기다리며 빈방을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이 시에서 ‘심심함’을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심심한 시간의 마음을 읽고 싶었습니다. 낙서는 심심풀이의 하나이지요. 바람도 대나무 우듬지도 등 굽은 기억도 아닌, 낙서 행위의 주체가 ‘시간’이리라는 낯선 상상이 기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