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늦게 도착한 편지에 관하여
[백정우의 줌인아웃] 늦게 도착한 편지에 관하여
  • 백정우
  • 승인 2024.03.2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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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라이브즈1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컷.

셀린 송 감독의 ‘패스트 라이브즈’는 답장을 쓸 수 없는 늦게 도착한 편지 같은 이야기다. 영화는 이런 이야기를 단골 소재로 삼아왔는데,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에서 도서관 대출카드에 그려진 마음은 발신자가 죽고 한참이 흘러서야 상대에게 도착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다림이 보낸 편지에 영정사진이 응답하고, 관객에게 내레이션으로 들리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질문. 해성은 왜 뒤늦게 뉴욕에 갔을까?

12년이 흘러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상대가 결혼한 유부녀라는 걸 알면서도 해성은 뉴욕으로 간다. 출국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여자 친구와 헤어지니 첫사랑이 보고 싶었냐는 말에는 “내가 미쳤냐? 걔 결혼했어”라고 질색하던 해성이었다. 그런데 오롯이 노라를 보러 간 것이었다. 해성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자신에게 기회가 있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 남자들은 종종 우쭐대고 망상에 사로잡히곤 하니까. 우리가 뉴욕에서 마주한 걸 보면 전생이 대단했을지도 모른다고 인연을 확장하는 해성이지만, 노라는 달랐다.

노라는 두 번의 이민을 거쳐 겨우 뉴욕에 안착했다. 감상에 젖을 겨를도 여유도 없다. 노라 눈에 해성은 어릴 적 기억을 붙잡고 칭얼대는 애기일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애기가 아니지”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노라는 어린 시절의 나영이를 해성에게 두고 왔는데, 해성은 노라를 만나면서도 여전히 기억 속의 나영이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왜 이런 오판을 하게 됐을까?

해성에겐 일상만 있고 생활이 없다. 대학에 가고 군복무를 하고 중국을 거쳐 뉴욕에 도착하는(졸업과 입사도 있었을 테고) 해성의 삶의 행로는 불연속적이다. 이를테면 해성의 대학시절, 강의를 듣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단 한 번 가족과의 아침식사에도 아버지는 대사조차 없다. 중국 야시장에서 옆자리의 여성과 눈웃음을 주고받지만 말은 하지 않는다(엔딩 크레딧에선 이 여배우가 해성의 여자 친구로 표기된다). 모두 한 번의 등장으로 끝난다. 친구들과 몇 번의 술자리 장면 역시 노라를 호명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생활이 아니라 일상적 파편의 나열이다. 과정은 생략된 채 결과만 보여준다. 왜? 노라 외에 어떤 것도 해성에겐 중요하지 않으니까. 감독은 의도적으로 해성에게서 생활을 제거해버렸다.

반면 노라의 숏은 현실적이다. 상황마다 사건마다 과정이 촘촘하게 박혀있다. 부모님의 이민 준비와 영어식 이름 짓기. 입국절차와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이동과 회의실 장면까지. 여행에서 아서를 만나고, 결혼과 캐나다 친정집을 거쳐 뉴욕으로 돌아와 연극 대본 리딩에 참석하며, 남편의 출간사인회와 침실의 긴 대화까지. 온통 일상이 이어지며 생활로 채워져 있다. 상황마다 대사도 있고 대화도 연속성을 갖는다.

노라와 헤어지기 직전 해성은 “이것도 전생이라면 우리의 다음 생에서는 벌써 서로에게 다른 인연인 게 아닐까. (…) 그때 보자”며 말끝을 흐린다. 이제 진짜 끝이란 걸 서로가 안다.

셀린 송 감독은 홍상수 영화를 좋아했을까. 해성은 생활은 없고 일상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관계는 없고 섹스만 쫓던 홍상수의 사내들과 별 차이가 없다. 12년 전 노라가 우리 잠시 시간을 갖자고 했을 때, 해성은 그때 뉴욕 행 비행기를 탔어야 했다. 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해성도 너무 늦게 도착했다.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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