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 척화비(斥和碑) 처리
애물단지 척화비(斥和碑) 처리
  • 승인 2015.03.2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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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종 시인
지난 세월, 청·장년 시절 4반세기(25년)를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교단에서 열을 축적했다.

과목 특성상 역사교과는 재미있는 과목이 되어, 가르치는 나도 배우는 학생도 흥미와 기대속에 수업시간이 다가오고 지나갔다.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즐겁지만, 역사수업을 교장, 교감, 선후배 교사에게 공개하는 ‘수업연구’는 보통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핑계만 있으면 공개수업을 미루거나 빠져나갈 궁리를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상사에게 불신을 당하고 미덥지 못한 교사로 낙인찍히기에 안성맞춤이다.

생각을 바꾸어 딴 학교로 전근 갔을 때, 공개수업 1호를 자청하여 연구수업 아닌 연극수업(?)을 멋지게 해보이면 상사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은 물론, 나도 수업공개 강박관념으로부터 해방된다.

‘공개수업’은 학생뿐 아니라 참관자에게도 재미있고 관심을 끌만한 ‘살아 있는 역사적 사실’을 주제로 해야 한다.

입으로 설명만 하는 수업은 몰매 맞는 수업이 되기 십상이라 괘도, 모형, 실물 자료 등을 충분히 갖춰야 했다.

그러다 보니, ‘다원군의 집권과 정치’가 내 공개수업의 단골메뉴가 됐다. 여러 가지 자료가 많겠지만, 대원군 단원 공개수업의 자료로 ‘당백전’ 실물과 ‘척화비’ 사진은 한약방 감초격의 필수물이다.

정치지도자는 확고한 국가관과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흥선 대원군 이하응(1820-1898)은 결단력과 박력으로 치면 조선조 제1인자란 생각이 든다.

민폐의 전당(?)격인 서원600여 개소 철폐(1871년)와 ‘경복궁의 중건’ 사업은 역대 임금들이 엄두도 못낸 화두들이다.

경복궁 재건의 경비조달을 위해 당시 상평통보 한 푼의 1백배인 당백전(當百錢)을 만들어 유통하는 통에 물가가 600%나 뛰어 민생이 피폐케 되고, 국가재정혼란이 가중되어 국민의 원망이 하늘에 사무쳤다.

장엄한 궁궐이 왕권의 상징이란 사상은 지금도 비판받고 있다. 공개수업 때 내가 보여준 ‘당백전’ 실물을 보고 뿅 가버린 교장선생님도 있었지만 다 지나간 일이 아니던가...

범 본 화상 창구멍 틀어막는 격으로, 외세침투를 두려워하여 쇄국정책을 쓴 것이 오히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일으켜 개국을 촉진하게 되었다.

병인· 신미양요에서 프랑스와 미국을 격퇴한 대원군은, 전국 요지에 독전비(督戰碑) 격인 척화비를 세우게 했다.

대원군이 훗날 청나라로 압송되어 척화비도 철거되고 쇄국정치도 끝장이 났다. 흥선대원군의 상징물이라 생각해서 일까?

척화비는 사정없이 깨뜨려지고 땅속에 매몰되는 신세가 되었다. 한 때는 자취도 없이 사라진 척화비가 지금까지 20여기 남아 있는 걸로 파악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척화비는 구시대의 부정적 유물인 만큼 사그리 없애야 한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있다.

역사의 교훈은 긍정적인 것 못지않게 부정적인 것도 소중한 것이다. 이제라도 남아 있는 척화비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영구보존대책을 세워야 한다.

척화비를 통해 당시 순간의 판단이 어리석었지만 국가보전을 위해 전력투구를 한 민본 정치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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