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예송논쟁(禮訟論爭)과 국장, 국민장
<대구논단>예송논쟁(禮訟論爭)과 국장, 국민장
  • 승인 2009.08.30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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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흥 (대구대 역사교육과 교수)

어느 시대든지 예의(禮儀)의 분별은 중요하다. 사람과 나라, 시대에 따라 적용 기준이 다를 수 있겠지만 보편성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 예의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예의염치(禮儀廉恥)를 중요시 여겼다.

일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조선이 성리학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건국과 동시에 예법(禮法)을 중시하여 정치·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하였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성리학은 고려 말에 들어와 조선에서 정치이념으로 수용하였지만 이것이 실제 생활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사림(士林)이 권력을 장악한 후 4색붕당(四色朋黨)으로 구분되기 시작하는 17세기 중·후반의 시기이다.

흔히 조선 17세기를 예학(禮學)의 시기라 부른다. 성리학에서 예의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여, 학문적 차원을 넘어 생활과 정치적 문제까지 적용되었다.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인 인물은 남인 이황과 서인 이율곡이다. 이들 두 사람이 주장한 학설은 점차 붕당이 형성되면서 자신들만의 학파 학설로 발전 계승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서로가 생각하는 예의의 해석과 적용 규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폭발한 것이 현종 때 서인과 남인 간의 예송 논쟁이다.

예송 논쟁은 두 차례 발생하면서 정치 주도권이 변화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먼저 1659년의 기해예송(己亥禮訟)은 인조의 둘째아들로 왕위에 오른 효종이 죽자 어머니인 인조의 계비(繼妃) 자의대비(조씨)의 상복 기간을 두고 벌어졌다.

당시 서인 송시열은 예의의 적용기준은 왕가(王家)나 사가(私家)가 동일하여야 한다는 보편성을 주장,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첫째는 소현세자)이기 때문에 1년 복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남인들은 왕위를 계승한 경우는 예외라는 분별성을 강조,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긴 하나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3년 복을 주장하였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관혼상제는 일반인은 `주자가례’를, 왕실에서는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하였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의 어머니의 상복규정은 장자와 차자 구분 없이 1년이었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 정권은 `국조오례의’의 장자와 차자의 구분이 없는 1년 복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차자로 보는 1년 복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남인 윤선도는 서인의 주장은 당시 차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효종에게 정통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소현세자의 셋째아들에게 정통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비판하였다.

위기감을 느낀 서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윤선도를 이종비주(貳宗卑主 : 종통을 둘로 나누고, 주인(임금)을 비천하게 함)를 내세워 삼수(三水)로 유배 보냈다. 많은 남인들이 윤선도를 옹호하다가 관직을 잃거나 좌천되었다. 결국 현종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주장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674년 효종비가 죽자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두고 벌어졌다. 기해예송에서 자의대비 상복기간은 장·차자의 구별 없는 1년 복이었다. 그러나 장자와 차자의 부인에 대한 상복 기간에 대한 규정은 달랐다.

`가례’에는 효종비가 장자의 부인이면 1년, 차자의 부인이면 9개월이었다. `국조오례의’에는 장·차자의 부인 모두 1년이었다. 서인은 기해예송 때 효종을 차자로 규정하였다고 생각하여 효종비 역시 차자의 부인의 예에 따라 9개월 상복으로 결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 대구 유생 도신징은 서인들의 상복 기간에 대한 예법상의 적용 잘못을 지적하고, 나아가 차자의 아들인 현종에게 과연 정통성이 있는가를 제기하였다. 이를 확대시킨 것은 당시 서인 내 송시열(산당)과 대립하던 외척 김우명(현종의 장인)과 김석주(한당)였다.

이들은 정권 장악을 위해 남인이 주장한 1년 복에 동참하였다. 현종 역시 자신의 정통성과 관련 있었기 때문에 남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서인 정권은 무너지고 남인들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서인과 남인의 본격적인 피비린내 나는 당쟁(黨爭)은 시작된다.

조선시대 예송은 예의의 적용 문제(보편성과 특별성)이며, 나아가 국왕의 전제권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최근 벌어진 국장과 국민장의 논란은 어떠한가? 법 규정이 미비한 문제도 있겠지만 현재 전직 대통령 서거 시 장례에 대한 결정은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정해진다.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은 자’의 기준은 무엇인가? 앞으로 많은 전직 대통령이 나올 것이고, 이들의 서거 시 무엇을 기준으로 장례 절차를 정할 것인가? 정치적 판단이 아닌 법률이나 사회 관념상 이해할 수 있는 규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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