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7개월 전 가로 190cm 대형 휘호 ‘역작 탄생’
타계 7개월 전 가로 190cm 대형 휘호 ‘역작 탄생’
  • 황인옥
  • 승인 2020.02.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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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헌 김만호의 예술세계를 찾아서 (38) 만년기(晩年期) 3. 1991(84세)
지난 날 돌아보니…
대구 주택·서숙 잊지 못하는 듯
큰 글자로 ‘봉, 강, 재’ 써내려가
퇴계 상소문 ‘성학십도’ 병풍화
40여년 전 만든 저서 새로 제본
다시-소헌선생-유지자사경성
소헌 선생이 타계(他界)하기 7개월 전인 신미년(辛未,1991) 입추(立秋)에 휘호한 작품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33.0x190.0cm,1991. 만년기(晩年期)의 역작(力作)이다. 소헌미술관 소장.

소헌스승의날
1991년(辛未) 스승의 날(5.15)에 만촌동 자택에서 소헌 선생(84세)과 제자들이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소헌 선생, 뒤 오른편이 부인 박경임(朴瓊姙) 여사.

1991년(辛未)은 소헌 선생이 타계(他界)하기 1년 전이다. 선생은 자신의 죽음이 눈 앞에 다가와 있음을 인지(認知)한 듯 했다. 선생은 신미년(辛未,1991) 음력 5월 5일 단오날을 맞아 아래와 같이 시호(試毫)를 했다.

◇소헌 팔사옹(八四翁) 시호(試毫)

「新級淸泉洗硯宿垢明(신급청천세연숙구명)/?靜?隨意下手非徒(창정궤수의하수비도)/ 怡養性靈可以延秊壽(이양성령가이연년수)/ 辛未端陽八四翁試毫(신미단양팔사옹시호)」

“맑은 샘물 새로 길러 벼루 씻고 묵은 때 맑게 하여, 창가 조용한 책상에서 뜻한바 붓들어 바르게 글 쓰노라. 닦아온 품성(性)과 신령(靈)이 가이 오래 이어가기를 바라노라. 1991년 단오날. 84세 늙은이 쓰다”

아울러 이 날 횡액 「鳶飛魚躍(연비어약)」을 휘호하고, 「鳳,岡,齋(봉,강,재)」 대자(大字) 3자(字當 45.0x45.0cm)를 화선지에 한 글자씩 따로 써서 보관해 두었다(소헌미술관 소장). 그동안 삶의 터전이었던 대봉(大鳳)과 만촌(晩村)의 봉강 언덕(鳳岡), 그 곳의 소박한 집(素軒) 그리고 그 문하(門下)에 대한 깊은 상념(想念)에 잠겨 있었는 듯하다. 훗 날에 이를 현액(懸額)으로 만들어 적절한 장소에 걸어 두라는 선생의 깊은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리라. 필자는 헤아려 짐작을 한다.

제24회 봉강연서회(회장,박선정) 회원전은 1991년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대구시민회관대전시실에서 제10회 영호남서예교류전과 겸해서 열렸다. 소헌 선생의 행초(行草) 작품 「安不忘危(안불망위)」가 출품 전시되었다. 타계(他界)한 광주의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선생의 유묵(遺墨)과 진주의 미성(未醒) 박춘기(朴春起) 선생의 유묵(遺墨)이 함께 전시되었다.

신미년(辛未,1991)의 입추(立秋)에 소헌 선생은 횡액(가로190cm) 해서(楷書) 대자(大字) 「有志者事竟成(유지자사경성)」을 휘호했다. 선생의 만년 시기 역작(力作)이라고 생각된다.

1991년 10월에는 대구문화예술회관 미술관이 개관되었다(대구직할시장,이해봉). 10실의 전시실과 수장고 3실, 작품처리실, 자료 관리실, 회의실, 휴게실 등 여러시설을 갖춘 현대식 전시공간으로 확충된 것이다. 미술관 개관기념으로 한국미협대구지부(지부장,배인호)가 주관한 「1991대구미술」 전람회는 한국화, 서양화, 조각, 공예, 서예, 판화, 디자인 분야의 현역작가 400여명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대구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미술전람회였다. 소헌 선생은 횡액 작품 「自强不息(자강불식)」을 출품하여 전시하였다. (미술관개관기념도록 p.364에 수록,1991)

◇「중화일편(中化一篇)」

소헌 선생은 1991년에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정성들여 완성하고 병풍으로 표구를 했다. (소헌미술관 소장). ‘성학십도(聖學十圖)’는 만년(晩年,68세)의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당시 17세인 선조(宣祖)를 위하여 자신의 학문적 경지를 10개의 그림(圖)과 해설(說)로 집약하여 상소(上訴)한 것이다(1568년). ‘경(敬)’이 구조화 되고 체계화 된 퇴계(退溪)의 독자적 사상으로 그가 만년(晩年)에 구축한 유학(儒學)의 세계이다.

또한 소헌 선생은 40여년 전 병술년(1946)에 도해(圖解)로 집필한 「중화일편(中化一篇)」 (29면)을 다시 정성스럽게 제본을 하여 소중히 보관했다. (소헌미술관 소장).

선생은 광복 이듬해인 병술년(丙戌,1946) 1월 1일부터 두문 불출하여 3주일 동안 ‘중(中)’자 한자를 얻고서 그 뜻을 해석하여 ‘중·화(中·化)’ 두자로 문장을 필기(筆記)하고 도식(圖式)을 만들었다. 30대 후반(39세)에 집필한 그의 저서(著書)이다. 이는 도상(圖象)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도학(道學)의 학문체계를 집약하기 위해 중용(中庸)의 체계 곧 천도(天道)와 인도(人道)의 현실적 체계를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선생은 1987년(80세)에 매일신문 연재 ‘나의 회고(回顧)<26>’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중 략>. 어린시절부터 나는 한학(漢學)서적을 필사(筆寫)하고 그것을 읽고 또 읽으면서 다시 익히곤 했다. 지금에 와서 그런 필사본(筆寫本)들을 뒤져보면 그 시절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깨알 같이 쓴 세필(細筆)의 자획마다 추억이 담겨 있고 옛 선현들의 깨우침들이 새삼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다하게 내놓을 만한 저서(著書)를 집필하지 못해서 아쉽기만 하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중화일편(中化一篇,1946)’과 ‘효시은거(隱居,1946)’, 8·15해방의 감격을 기록한 ‘병술감상(丙戌感想,1946)’은 상당히 애착이 간다. ‘중화(中化)’는 중용(中庸)에서 심취해 얻은 깨달음을 정리해서 도표(圖表)로 만들어 이론적 체계를 세워 본 저술(著述)이다. 1946년 병술년(丙戌年)에 만든 ‘중화일편(中化一篇)’의 도해(圖解) ‘중화도(中化圖)’와 인생의 진로(進路) 및 평생의 행로(行路)를 도해(圖解)로 설명한 ‘진로도(進路圖)’는 당시의 내가 추구하던 가치관을 요약했던 것 같다. 그 중 ‘진로도(進路圖)’의 풀이를 일부 소개하고자 한다. (지면관계로 그림 생략)

“最中太極은 陰陽이 動而變化爲人하여 始生於萬物造化之中한 것이다. 光明之面은 眞正道德光明界陽이요, 闇黑之面은 脫線惡質闇黑界陰이다. 性字之界는 本城不失上達賢哲之明이요, 道字之界는 率性行善修道光明之兆, 德字之界는 修道布德致化顯達之光, 私字之界는 失性守私保牧自身之暗, 利字之界는 收其私心務得租己之變, 慾字之界는 遂其大欲威公己獨之黑이다.

入德者는 不失本性하여 착한 길로 들어가니 보통의 착한 光明의 길에 들어선 것이고, 小德者는 차차 착해져서 賢明自由의 光明의 길로, 行德者는 德을 알고 행해서 道德이 비치는 光明의 길, 明德者는 明其明德의 光明의 길, 大德者는 道德이 혁혁하여 顯達通明의 光彩의 길로 든 것이다. 入惡者는 선악의 상반으로 半光半暗의 길에 든 것이며 小惡者는 善은 적어지고 惡이 勝하여 裟婆로 들어가 自由를 잃는 길에, 行惡者는 利를 탐하여 惡을 행함으로써 拘束의 길, 能惡者는 惡에 能하여 압박과 구속으로 辛苦의 길, 大惡者는 惡上加惡罪上加罪하여 감옥 刑死刑暗黑의 길에 든 것이다”.

한편 을유년(乙酉年)에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고 이듬해인 병술년(1946)에 국내 정세를 보고 썼던 감상록 ‘병술감상(丙戌感想)’에는 내 나름의 감격과 시국관이 담겨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학문(學問)의 깊은 곳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어언 80고개를 접어들어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몸이 불편하지만 가 닿을 수 있는데 까지는 나아가 봐야겠다고 지금도 마음 먹고 있을 따름이다. <후 략>」. 라고 기록되어 있다. (매일신문, 나의 회고<26>,1987.9.23)

한편 선생의 감상문 ‘병술감상(丙戌感想,1946)’에는 당시의 시국관(時局觀)과 함께 다음과 같은 그의 중화이론(中化理論)이 담겨져 있다.

「말을 함에는 반드시 그 중(中)을 생각하고, 행동함에도 반드시 중(中)을 생각하고, 벗을 사귐에 있어서 반드시 중(中)을 생각하며, 시비에는 반드시 중(中)을 생각하고, 음식에도 반드시 중(中)을 생각하며 모든 일을 행함에 반드시 많은 실마리가 있음을 생각하나 어려운 것은 중(中)이다. <중 략>. 바른 도(道)로서 중(中)을 얻은 사람이 어찌 화(化)를 얻지 못하리요. 화(化)라는 것은 큰 덕(德)이 돈독히 변화한 것이니 악한 사람이 스스로 힘씀이다. 효(效)는 곧 화(化)이니 속히 힘쓰는 사람은 속히 변하여 中(중)하고 깨달은 사람도 반드시 변화되고 악한 사람이 모두 변화한 즉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다. 천명을 받은 즉 나라에 잘못된 정치(政治)가 없을 것이오, 이웃 나라들도 모두 변화하리니 어찌 큰 도(道)가 아니리오. <후 략>」. (병술감상,1946,소헌미술관 소장)

1986년 영남대 학보의 특별 취재 「서도의 정신세계-이 시대의 담백한 대화, 소헌 김만호」의 대담에서 소헌 선생은 ‘중용(中庸)’의 ‘중(中)’자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저는 10살이 좀 넘어서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읽어 나갔는데 ‘중용(中庸)’에 늘 마음이 갔습니다. 중용에 담겨진 뜻을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쉽게 설명한다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중(中)’자는 ‘꼭 맞을 중‘자이며, ’바르고 옳을 중‘자라 할 수 있습니다. <중 략>. 중(中)은 수양을 통하여 옳고 바른 일을 통해서만 잡힐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中)이 아닙니다. 옳고 바른 일이 최고의 가치(價値)입니다. 중(中)을 지켜야 합니다. 나라도 중(中)을 잃어 버리면 마침내 멸망합니다. 옳은 생각과 옳바른 일, 바르고 옳은 말을 하는 것이 중(中)입니다. <후 략>」. (영대신문,1986.7.2)

김영태 영남대 명예교수(공학박사,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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