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선 발견한 뢴트겐, 세계 최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X-선 발견한 뢴트겐, 세계 최초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로
  • 김종현
  • 승인 2020.05.06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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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노벨상을 품자 - (13) 수상자들의 개관
1901년~2019년까지 213명 수상
2회 수상자는 미국 ‘존 바딘’ 유일
최연소는 ‘윌리엄 브래그’ 25세
최연장자는 ‘아서 애슈킨’ 96세
여성 수상자는 ‘마리 퀴리’ 등 3파키스탄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르’
1933년 논문 발표 후 1983년 수상
노벨상 받기까지 50년 걸리기도
노벨상-돌쇠물리학상수상
괴팍하고 하고자 하는 의지가 노벨 물리학상을 타게 한다. 그림 이대영

노벨 재단은 1901년부터 2019년까지 물리학에 관련된 발견 및 발명으로 ‘인류에 가장 탁월한 기여’를 한 공로자 213명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수여했다. 113번 시상에서 209명의 물리학 공로자에게 개별로 수여했다.

2회 수상자는 반도체와 트랜지스터 발명 공적으로 1956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데 이어 1972년에 초전도체이론으로 재차 수상자가 된 존 바딘(John Bardeen, 1908~1991)뿐이다.

최연소자는 1915년 수상자인 윌리엄 로렌스 브래그(1890~1971)로 25세였으며 최연장자는 2018년 수상자인 아셔 애슈킨(1922년생)으로 96세이다.

여성 수상자는 다른 노벨상보다 희소한 3명으로 1903년과 1911년 수상자 마리 퀴리(1867~1934), 1963년 마리아 괴퍼트 메이어 (1906~1972)와 2018년 도나 스트리클런드(1959년생)가 있다.

1903년도 수상자인 마리 퀴리는 “가난하여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고 난로조차 없어 손가락이 곱아서 글씨조차 쓸 수 없는 연구소에서...”라고 시작하는 위인전 ‘퀴리 부인’과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졌다. 1963년 독일 태생 마리아 괴퍼트 메이어는 ‘원자핵의 핵 껍질의 모형’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해 퀴리(Curie)에 이어 두 번째로 수상한 여류 물리학자가 되었다.

노벨상은 행운아의 징표이기도 하다. 수상자의 업적을 장기 검증하기에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수상하기까지 20년에서 50년이 걸린 경우도 있다. 1933년 ‘별의 구조와 진화’에 관한 연구로 논문을 발표했던 파키스탄 물리학자 수브라마니안 찬드라세카르(1910~1995)에게 1983년에 노벨물리학상이 수여되었다.

◇괴팍한 성질머리가 노벨물리학상을 타게

노벨상의 첫 시상은 1901년부터다. 이중 첫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뢴트겐이다.

1861년에서 1863년까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기술학교에 다니던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1845~1923)은 1865년 선생님의 얼굴을 우습게 그린 친구를 밝히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대해 “죽어도 고자질은 못 하겠다”라는 자존심으로 거부하다 졸업을 앞두고 퇴학당했다.

‘불온한 학생’이라는 블랙리스트로 인해 조국인 네덜란드뿐만 아니라 독일의 직업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도 들어갈 수 없었다. 공식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학입학 자격까지 박탈되었다. 1865년에 위트레흐트 대학에 입학을 시도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백방으로 방법을 강구한 결과 해결책을 찾았다. 스위스 취리히 연방 기술 전문학교는 시험만 통과하면 입학할 수 있었다. 스위스로 옮겼으며 그곳에서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869년에 취리히 대학(University of Zurich)에서 아우구스트 쿤트(1839~1894)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프랑스로 옮겨 1874년에 스트라스부르 대학(Strasbourg University)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다음 해에 호엔하임 농업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1876년에 스트라스부르대학 물리학 교수로, 1879년 독일 기센 대학의 물리학 과장(chair of physics)으로 지명되었다. 1888년에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895년 11월 초, 뷔르츠부르크 대학 연구소에서 ‘뭔가 가치 있는 광선(remarkable X ray)’을 발견했는데, 레나르트(Philip Eduard Anton von Lenard, 1862~1947)의 진공관 가운데 하나로 실험을 반복하던 참이었다. 진공관의 음극선 방출을 위해 얇은 알루미늄 창(aluminum window)을 덧대고, 알루미늄 손상을 방지하고자 마분지(cardboard)로 덮개를 했다. 이때 바륨(barium)을 칠했던 마분지 조각에 음극선의 형광작용(fluorescence effect)이 발생하였고 이를 발견했다.

◇“하고자 하면 귀신도 못 말린다.”

AD 445년 송나라 범엽(範曄, 398~445)이 저술한 ‘후한서(後漢書)’에서 유수가 경엄을 칭찬하며 “장군이 전에 남양에서 큰 계책을 세워놓았다고 할 때, 당시에는 함락해 통합하는 것이 어려워 보였지만 반드시 하고자 한다면 귀신도 못 말릴 것이다”라고 했듯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s a will there’s a way)”라는 속담을 확신했고 뜻을 이뤘다.

1907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미국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컬슨(1852~1931)은 폴란드 스트렐노(Strzelno, Poland)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54년 삼촌이 사는 샌프란시스코로 일가족이 이주해 1969년 고등학교를 겨우 마치고, 1873년 학비가 들지 않는 아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United States Naval Academy)에 입학해서 1985년 졸업한 뒤 2년간 해상근무를 하고 모교 해군사관학교로 되돌아와서 화학과 물리학 교관으로 강의를 했다.

광학과 음향학에 관심을 가졌기에 매질(媒質) 연구를 했으나 생각지도 않게 광속도 측정 실험을 시작했다.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1879년 워싱턴 소재 항해력국(Nautical Almanac Office, Washington)에 초빙을 받아 광속 측정 업무를 맡았다.

세계적인 연구 방향감각을 익히고자 1880년 베를린대학교, 하이델베르크대학교, 파리대학교, 파리 폴리테크 등지에서 연구했으며 베를린대학교 포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 교수의 지도를 받아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7년 광속 측정 실험으로 초속 29만 9천 940km라는 결과를 도출, 1881년 마이컬슨 간섭계(Michelson interferometer)를 고안했다. 1883년 미국으로 귀국해 케이스 응용 대학교 교수를 맡았다.

1885년 마이컬슨-몰리 실험(Michelson-Morley experiment)이란 공동 프로젝트를 실시하여 1902년 ‘광속(Velocity of Light)’, 1903년 ‘광파와 이용(Light Waves and Their Uses)’으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Einstein’s theory of relativity)의 길을 열어놓았다.

190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굴리엘모 마르코니(1874~1937)는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 Italy)의 대단위 농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볼로냐 대학교수를 가정교사로 채용해서 전기, 자기 및 과학 전반에 대한 지식을 익혔으며 18세에 볼로나 대학에 입학해 전기전파에 관해 공부했다. 1888년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와 공동 프로젝트로 무선통신(wireless telegraphy)을 구상했고, 자택에서 무선전신 실험을 하고 3km까지 무선통신 장치를 발명했다.

1896년 무선전신 영국 특허를 획득하고, 영국 체신청에 최초로 실험 도입에 성공했다. 1897년 런던 마르코니 무선전신 회사를 창립하고 통신사업을 시작했으며 도버해협에서 영불 무선통신 성공에 이어 대서양 간 무선통신 실험에도 성공했으나 무선 전선 해저전신 사업은 저항을 불러왔다. 1902년 자기 검파기(magnetic detector)와 1905년 수평 지향성 안테나(horizontal directional antenna) 등을 발명했다.

1910년 수상자인 판데르 발스(1837~1923)는 1837년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태어났다. 노동자 계급인 목수 가정에서 10명의 자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으로 인해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독학으로 천신만고 끝에 대학입학 시험에 합격했으며 교사가 되기 위해 1856년부터 1861년까지 5년간 피나는 노력으로 교생실습과 선발시험을 거쳐서 자격을 얻었다. 1862년부터 레이던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및 천문학 강의를 청강할 수 있었으며 수학과 물리학 교사 시험에 2년간 도전했다. 드디어 1865년 데벤테르에서 물리학 교사가 되었으며 금상첨화로 기회를 포착해 1873년에 레이던 대학(University of Leiden)의 피테르 리케(Pieter Rijke, 1812~1899)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아 ‘가스와 액체 상태의 연속성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877년 최초로 암스테르담 시립대학(Municipal University of Amsterdam)에서 물리학 교수로 임명되어 1907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글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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