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상에 담긴 영생 욕망, 전통·현대 잇는 선율로 깨우다
석상에 담긴 영생 욕망, 전통·현대 잇는 선율로 깨우다
  • 황인옥
  • 승인 2020.05.1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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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길중 사진전 진행 중인 루모스 ‘Artist Talk& Music Concert’
음악이 된 사진
전시에서 영감 받은 곡 발매
현대국악앙상블 ‘굿모리’ 연주
동서양의 조화로운 선율 선사
권은실 작곡가의 도전
“사진을 음악화한 첫 케이스”
“그림·음악은 보완하는 관계
시대 맞춘 장르 협업 매력적”
윤길중전시작품-인간의욕망
윤길중 전시작품 ‘인간의 욕망’ 시리즈 앞에서 권은실 작곡가의 창작곡 ‘인간의 욕망’을 현대국악앙상블 굿모리와 소리꾼 오영지가 연주하고 있다.

‘사진 예술을 음악으로 감상’하는 발상의 전환 앞에서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깨졌다.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 전시 중인 사진작가 윤길중의 작품이 현대 음악이라는 장르에 녹아들었다. 작곡가 권은실이 윤길중의 사진에 영감을 받아 작곡을 하고 지난 9일에 전시된 작품 앞에서 권은실이 이끄는 연주팀 현대국악앙상블 굿모리가 콘서트를 펼쳤다. 시각예술의 청각예술화가 가능할까 싶다가도 막상 콘서트가 시작되고 연주 소리가 화폭으로 서서히 스며들자 “이래도 되는구나” 싶었다. 낯설지만 충만한 경험이었다. 이날 콘서트는 윤길중 사진전 및 작품집 ‘Human Desire’ 출간을 기념한, 사진과 음악이 함께하는 ‘Artist Talk& Music Concert’ 였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권은실은 익숙하지 않았다. 작곡가가 공연장이 아닌 전시장에서 창작곡 초연 무대를 여는 것은 통념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다. 그래서일까? 전시장에서 공연 준비로 분주한 그녀의 몸짓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진 작품을 음악으로 작곡한 대구 첫 케이스일 것”이라는 그녀가 “윤길중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작품에서 작가의 예술관이 오롯이 전해졌다”며 사진을 모티브로 작곡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사진을 먼저 보고 나중에 작가님과 대화할 기회가 생겨 작품 설명을 들었어요. 그때 ‘이 작품을 음악으로 표현하면 어떨까’하는 욕구가 솟구쳤어요.”

루모스에 전시된 윤 작가의 작품은 ‘인간의 욕망(Human Desire)’ 시리즈와 ‘시소(see saw)’ 시리즈. ‘인간의 욕망’ 시리즈는 영생과 안락한 삶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무덤가나 마을 어귀의 석인상과 석장승을 촬영한 모노톤의 작품이다. 그리고 ‘시소’시리즈는 생화와 조화의 혼용으로 ‘본다’라는 의미에 덧씌워진 선입견을 깨부수고, 본질에 대한 집중과 그 가치와 의미를 드러낸 작품이다. 이날 공연에서는 창작곡 ‘인간의 욕망’과 ‘해금과 가야금을 위한 미메스(Mimesis)’ 등 두 곡이 연주됐다.

이날 하이라이트는 초연 무대를 펼친 ‘인간의 욕망’. 무덤이나 마을을 지키는 오래된 석상을 촬영한 윤 작가의 작품 ‘인간의 욕망’을 권은실이 음악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윤 작가의 토크가 끝나자 곧바로 전시 작품 ‘천인상(千印象)’ 앞에 놓인 25현 가야금에서 엄윤숙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일순간, 전시장의 공기가 천지 개벽의 기운으로 요동쳤고, 사진 속에서 잠자고 있던 천인상이 첫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리꾼 오영지가 ’인간의 욕망‘이라는 가사를 노래로 토해내자, 서민기의 생황과 정혜진의 클라리넷이 가세하자 석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진을 뚫고 전시 공간 속으로 밀려나왔다. 그리고는 연주자와 객석 그리고 석상이 하나가 되어 광활한 우주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음악이 일으킨 화학반응에 의한 착시였다. 음악이 사진을 움직이고 사진이 음악을 깨우며 들숨과 날숨처럼 호흡을 주고받은 결과였다. 모노톤의 석상에 새겨진 선조들의 영생에 대한 욕망과 권은실이 음율에 실은 모노톤의 진중한 현대인의 욕망이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창작곡 ‘인간의 욕망’은 국악기가 중심을 잡고 서양악기가 받쳐주는 형식을 취했다. 각기 다른 악기의 음색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 시작해 겹겹이 어우러졌다. 판소리는 과거의 선조들이 석인상과 석장승에 새긴 불멸에 대한 염원을 현대의 후손에게 전달하는 매염제였다.

“수천년을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인간의 욕망을 수호한 석인상과 석장승의 운명을 처연한 판소리와 동서양 악기의 선율에 담아냈어요.”

권은실의 또 다른 창작곡 ‘해금과 가야금을 위한 미메스(Mimesis)’는 2017년 작곡되고, 스위스에서 초연됐다. 이날 공연에서는 윤 작가의 작품 ‘시소(see saw)’ 시리즈 작품 앞에서 연주됐다. 미메스는 그리스어로 ‘모방’이라는 뜻인데, 권은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미메시스를 ‘자연의 재현’이라고 말한 것에서 착안해 자연의 소리를 음악의 선율로 모방했다”고 밝혔다. 특히 “바람, 물, 불 소리를 악기에 담아내는데 집중했다”고도 했다. 이날 연주에는 정유정이 가야금을, 이아름이 해금을 담당했다.

‘해금과 가야금을 위한 미메스(Mimesis)’는 나뭇가지나 문풍지를 흔드는 세찬 바람소리를 1악장에, 동굴이나 작은 시내를 흐르는 물소리나 파도소리를 2악장에, 타닥타닥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는 3악장에 배치했다. 자연의 소리를 모방하기 위해 해금을 손으로 퉁기거나 가야금을 활로 퉁기는 악기간의 모방도 서슴지 않았다. “윤길중 작가가 시소 작품에서 사물의 본질에 집중하고 한 것과 의도가 비슷해서 이 작품을 ‘시소’ 작품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어요.”

그림과 음악의 콜라보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이미 독일 유학 시절에 뮌헨 시립미술관과 협업 경험이 있었다. 전시작품을 모티브로 권은실이 작곡을 하고 전시 오프닝에서 초연 무대를 가졌다. 권은실은 타 장르와의 협업을 음악의 확장이자 시대적 요구로 받아들인다.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지면  다양한 형식의 음악을 시도할 계획이다. 

그녀가 “그림에 음악을 입히는 작업은 색다른 매력이 있다”며 “시각의 청각화이자 청각의 시각화”라고 했다. “음악은 찰나의 예술이며, 연주하는 순간이 지나면 허공에 흩어지고 없어요. 그러나 사진이나 그림은 전시가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까지 공간에 남아있어요. 언제든 보고 싶으면 볼 수 있죠. 청각예술의 부족한 점을 시각예술이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 장르 사이의 협업은 매력이죠.”

우연한 만남에도 인과관계는 존재한다. 권은실과 윤길중이 서로 다른 예술장르로 인연을 맺은 것도 인연의 조홧속이 없었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을까? 권은실이 “윤 작가님의 작품에 흐르는 한국적인 정서가 나의 예술에서도 고고하게 흐른다”며 둘 사이의 공통점을 언급했다. 윤길중이 소외된 대상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한국적인 따뜻한 시선으로 사진예술로 펼쳐왔듯, 권은실도 서양음악에 한국의 전통악기를 적극 끌어들이며 한국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이번 콘서트가 성사된 배경에 두 예술가의 공통된 예술 철학이 있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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