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시간' 하루 아침에 내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사라진 시간' 하루 아침에 내 삶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 승인 2020.06.1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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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도 없이 평행세계로 던져진
혼란스러운 개인의 정체성 묘사
수미쌍관 구조…영화 주제 전달
사라진시간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누구나 가끔은 그 괴리가 너무 커서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있다. 그 혼란은 시작과 끝도 없고 합리적인 설명도 불가능하다.

배우 정진영의 연출 데뷔작 ‘사라진 시간’은 영화의 내용도, 문법도 딱 이런 정체성의 혼란과 같은 영화다.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 이 마을 학교 교사로 부임한 수혁(배수빈 분)과 그의 아내 이영(차수연) 부부는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비밀이 한 가지 있다. 그 비밀을 우연히 마을 주민 해균(정해균)이 알게 되고, 순식간에 마을 전체에 퍼진다. 얼마 되지 않아 수혁 부부는 의문의 화재 사고로 사망하고 형사 형구(조진웅)가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형구는 마을 사람들이 이 사고와 관련돼 있다는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수사하던 중, 갑자기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똑같이 존재하고 있는데, 집도, 가족도, 직업도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신을 형사가 아닌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영화는 평행세계라는 설정을 가져와서 한 개인의 정체성 혼란을 묘사한다. 내 주변 사람들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나만이 달라진 것 같은 그 혼란을 아무 예고도 없이 다른 평행세계에 던져진 형구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평행세계라는 소재와 교사 부부가 당한 의문의 화재 사건을 연결한 시도는 신선했다. 그러나 왜 형구가 다른 세계에서는 수혁의 모습이 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마치 삶이 그렇게 설명도 예고도 없이 흘러간다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장르적 정체성에 대해서도 쉽게 정의할 수 없다. 초반에는 수혁 부부의 비밀과 마을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 등에 대한 미스터리를 고조시키며 궁금증을 유발한다. 중반부부터는 마침내 형구가 등장해 마을 사람들이 숨기고 있는 진실을 추적해나가는 듯하지만 이런 식의 추적극 또한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아님을 관객은 곧 알게 된다. 이내 형구가 혼란스러워하는 상황들이 이어지지만, 결말 부분에서 답을 내려주지도 않는다. 미묘한 표정으로 길거리를 걷는 형구의 모습으로 시작되고 끝나는 수미쌍관 구조가 영화의 주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형구가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라고 소개됐지만, 그 ‘자신의 삶’이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며 구조 자체를 흔들어버린다. 극 속 형구가 존재하는 두 세계의 경계, 영화 장르의 경계가 흐려지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작품이다 보니 기승전결 역시 당연히 없다. 여기에 더해 강약 조절도 없다. 클라이맥스라고 부를만한 부분도 없고 초반부에는 교사 부부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는다. ‘형구가 자신의 삶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다’는 이미 알려진 시놉시스까지 가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왜 나를 다른 사람으로 살라고 하나”라는 극 중 형구의 대사는 33년 경력의 베테랑 배우이자 신인 감독인 정진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 같기도 하다. 어렸을 적부터 영화 연출이 꿈이었고 ‘사라진 시간’으로 마침내 그 꿈을 이룬 그의 정체성은 배우 또는 감독이 아니라 배우와 감독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18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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