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를 넘어선 판화로 삶과 죽음을 잇다… 인당뮤지엄, 박철호 Spielraum전
판화를 넘어선 판화로 삶과 죽음을 잇다… 인당뮤지엄, 박철호 Spielraum전
  • 황인옥
  • 승인 2020.06.21 21: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작업관의 발견
행복한 새와 죽어가는 새 보며
절망과 희망 공존하는 삶 발견
길 위 나무 등 풍경 세밀히 관찰
자연 통해 세계 확장 근거 마련
회화와 판화의 접목
실크스크린·파라핀·천·銅…
다양한 재료·기법 자유자재 구사
드로잉·조각 등 100여점 출품
30여년 화업 변화과정 한눈에
박철호 작가
회화와 판화를 한 평면에서 동시에 구사하며 자연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박철호 작가의 전시가 인당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다.

회화 전공자가 그림 그리기에 열심인 다른 미술학도들과 달리 캔버스에 앞에서 서성이고 있다면 십중팔구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음이다. 그렇다고 그림에 대해 회의를 가진 기억은 없으니 길을 잘못 들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작가 박철호가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으로 일찍부터 판화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아야 했던 30여년 전 대학 재학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캔버스 앞에 앉아서 물감과 붓으로 형상을 표현하는 회화 작업 방식이 지루하게 느껴졌어요. 회화라는 매체에서 화가가 개입할 여지가 제한적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드라마틱한 매체인 판화를 마나자 바로 빠졌죠.”

판화와 회화를 접목하며 독특한 조형예술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박철호가 판화에 처음 눈을 뜬 시기를 대학 2학년 때로 기억한다. “우연히 선배의 판화 작업을 지켜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회화보다 훨씬 역동적인 몸의 노동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뛰었죠.” 운명처럼 판화를 만났지만 회화와 결별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평면 위에 다양한 프로세스들이 자박거리기는 것에 가슴이 뛰었을 뿐이었다.

“다양한 프로세스들로 인해 평면이 더 드라마틱해지는 것에 흥미를 가졌고, 그러한 것을 즐기려 했던 것 같아요.”

판화는 작가에게 회화와 다른 강도의 과제를 부여했다. 물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다루는 기술을 습득하는 선결과제가 주어졌다. 물성을 탐구하고, 기술을 습득하고, 그것을 작품의 완성도로 연결하는 모든 과정이 도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도전정신에 끌려 스스로 선택한 길이어서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신 스텝 바이 스텝으로 한 걸음씩 판화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대학 시기의 작품들은 해먹의 강렬한 묵색 얼룩과 애칭의 날카로운 선들이 석판화와 애칭과 같은 판화로 표현되었어요.”

판화를 독립적으로 접근하기보다 회화의 연장으로 인식했다. 회화와 판화의 접목으로 평면에 드라마틱한 서사를 확보해야 한다는 목적은 시간이 흐를수록 만족스러운 결과치를 노정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스승이나 선배가 없다는 것. 그 때나 지금이나 판화는 비인기 종목이었고, 그로인해 겪어야 했던 수많은 시행착오는 절망과 희망의 순간들을 넘나들게 했다. 그런 시간들이 길어질수록 더 새로운 것에 대한 목마름은 커져 갔고, 마침내는 탈출구를 찾기에 이르렀다.

미국 뉴욕으로 떠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의 나이 33살 때, 새로움을 찾아 길을 나섰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대학에 초청 받아 1년간 대학원 과정을 수료했으며, 이후에 뉴욕에 있는 판화스튜디오에서 작품활동을 이어갔다.

새로움을 찾아 미국 땅에 스스로를 던졌지만 작업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막막한 시간들이 쌓여갈수록 어깨를 짖누르는 초조함의 무게도 높아갔다. 그때마다 담배를 물고 창밖을 응시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차장 너머 비둘기 한 무리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서로의 털을 다듬어주며 애정 공세를 펼치고 있는 비둘기 한 쌍과 그 너머에 풀이 죽어서 웅크리고 있는 무리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작가의 뇌리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그래 저 비둘기들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하고. 새를 소재로 한 ‘절망과 희망(Despair & Hope)’ 연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작가가 “행복한 새, 외로운 새를 보면서 비둘기의 삶이나 인간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특히 외로운 비둘기들을 보면서 이국땅에서 길을 찾고 있는 저의 모습이 투영됐다”고 밝혔다.

‘절망과 희망’ 연작은 뉴욕에서 유조선 사고로 기름 범벅인 된 새들과 여행길에서 로드킬을 당한 새들을 목도하면서 2년간 더욱 견고한 서사로 발전했다. 동판, 석판, 드로잉, 오목판화 등 다양한 판화기법으로 표현된 이 연작들은 미국에 초대되어 전시를 갖기도 했다.

이시기부터 작가의 작업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대주제인 ‘자연’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첫 연작이 ‘절망과 희망’이었다. 추락이라는 절망의 끝에 비상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새의 이중적인 상황을 묘사하며 자연을 개념을 풀어내는 중심추로 등장시켰다. 

2000년대부터 새의 자리를 식물이 대신했다. 작품 ‘조우(Encounter)’ 연작. 어느 날 작업실 창밑에 놓아둔 병속에 키우던 식물을 보고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병 속의 식물인데도 한 가지에서는 싹이 나고, 다른 가지는 말라 죽어갔어요.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었죠.” 추락하는 새에서 절망과 희망이 공존했듯, 병 속 식물에서도 삶과 죽음이 공존했다. 자연을 소재로 한 연작들이 추가될수록 주제는 보다 높은 형이상학으로 확장되어 갔다. 자연 소재들은 이후에도 꽃이나 벌집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해갔다.

“이 시기에 하나뿐인 형이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고, 형의 죽음으로 생명의 삶과 죽음에 대해 더 집착하고 매달렸던 것 같아요.”

2010년 즈음부터 알루미늄 판 위의 실크스크린, 석판화, 동판화, 오목판화 등 판화적인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되었고, 작업에도 큰 변화가 찾아들었다. 판화와 회화의 경계가 허물어졌고, 작업에서 더 큰 자유를 확보했다. 그는 이 시기, 판화 재료로 천을 사용하며 판화의 고정관념에 도전장을 던졌다. 또한 빨강, 파랑 등 그동안 자제해왔던 원색들을 거부감이 표현하며 색채의 파란도 예고했다. 소재적인 면에서도 새나 식물 등의 미시적인 자연에서 숲이나 물결 등의 거시적인 자연으로 확장해갔다.

물성이나 기법적인 변화는 결국 주제의 확장으로 연결되었다. 그는 삶과 죽음이라는 단편적인 이분법에서 벗어나, 이 둘을 하나로 아우르는 ‘순환’으로 의식을 집중해갔다. “나이 50이 되니까 많은 부분을 내려놓게 되었어요. 작품을 팔아야겠다는 욕망이나 잘하려는 마음이 사라졌죠. 주제도 지엽적인 것에서 근원으로 들어가려 했어요.”

욕망을 내려놓은 신호탄은 2010년부터 시도한 ‘공존(Coexistence)’ 연작. 여행 중에 정지한 나무 풍경을 촬영하고 확대했는데, 의외로 나무에서 미세한 흔들림이 발견하고는 그 현상을 가시화했다. “자연과의 공존, 피부색이 다른 사람과의 공존, 부자와 가난한 사람과의 공존은 자연의 순환처럼 우리를 평화롭게 하는 가치라는 믿음이 커져갔어요.”

순환에 대한 또 다른 서사인 ‘물결(Ripple)’ 연작도 발표했다. 좌우 대칭이 아름다운 나뭇잎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마치 물결이나 빛이 물결처럼 일렁이는 모습을 닮아있다. 이 작품은 최근 2~3년간 집중도를 높여왔다. 올해는 린넨 천에 회화로 표현한 ‘물결’ 연작도 병행했다. 또한 가장 최근에 시도하고 있는 ‘반영(Reflection)’ 연작에는 파문마저도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50을 넘기니 삶도, 작업도 수용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작가로서 살아온 30년은 고단했다. 특히나 비인기 분야인 판화와 함께 한 세월은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작품을 판매하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못할 만큼 판화에 대한 인식은 낮았고, 스승 없는 여정은 힘에 부쳤다. 판화 자체에는 여전한 열정과 애정으로 넘실대지만 호의적이지 않은 판화에 대한 고정관념은 작가의 삶을 접을까를 고민하게 할 만큼 절망적이었다. “40대가 되자 판화를 그만둘까를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로 힘이 들었어요.”

그러나 결코 절망이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다양한 판화기법, 납이나 파라핀 등의 물성의 다변화, 판화와 회화의 접목 등 새로움을 향한 여정은 끝없이 펼쳐졌다. 바로 그 도전 정신이 현실적인 면에서 그의 발목을 잡기도 했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에 돌이켜보면 “잘 한 일 같다”며 웃는 박철호. “어렵게 많은 도전을 했는데 이제는 그 도전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작업에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 같아요.”

작가 인생 30년이 지나니 이제야 예술이 조금 보인다는 그. 그러면서 “좋은 그림이나 나쁜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달관자적인 말을 했다. 속내는 “욕심을 뺐느냐, 빼지 못했느냐”의 문제라는 것. 그가 “모든 것은 마음의 문제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지금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할 때 나를 가꾸고 비워내는 일 같아요. 그것이 결국 예술과 맞닿아 있을 때 진짜 예술이 나오는 것 같아요.”

중학교 때부터 만화를 즐겨 그리고 각종 잡지나 신문사 독자란에 만화를 보내기도 하며 자연스럽게 미술 작가의 꿈을 키워왔다. 작가가 꿈이었다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맡겼다는 표현이 더 맞을 정도로 미술은 그와 함께였다. 하지만 “30여년이라는 모질고 외로웠던 시간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동료’였다”고 고백했다. “함께 걸어가는 동료들의 동지의식과 격려가 있어 지금까지 작가로 버텨왔던것 같아요.”

그가 “지금까지 모나거나 드라마틱한 작가는 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대구보건대학교 인당뮤지엄 전시에 초대된 지금이 작가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라며 이번 전시에 기쁨을 표했다. 그의 인당뮤지엄 전시는 지난 19일 개막해, 연대기별 작품 변화과정을 작품으로 펼쳐놓았다. 린넨에 회화로만 표현한 최근작품이 20점이 걸렸는데 이 연작은 지금부터가 시작인 것처럼 보인다. 판화, 드로잉, 회화, 조각, 설치 등 100여점을 소개하는 박철호 인당뮤지엄 ‘Spielraum’전은 내달 30일까지. 053-320-1857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