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사랑한다 루비아나...벨라 타르 ‘토리노의 말’을 떠올리다
[백정우의 줌인아웃]사랑한다 루비아나...벨라 타르 ‘토리노의 말’을 떠올리다
  • 백정우
  • 승인 2020.06.25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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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의 말’ 스틸컷.

모름지기 극장이 가장 가까워야할 내게 극장보다 더 급하게 가야할 곳이 생겼다. 박찬원 사진전 ‘사랑한다 루비아나’가 열리는 사진 전문갤러리 Lumos가 그곳이다.

서러브렛 품종 백색 경주마(였던) 루비아나는 1999년 2월 미국 렉싱턴에서 태어나 2007년 한국으로 온 이래 여덟 마리 새끼를 낳은 후 2017년 4월 15일, 제주도 대성목장에서 다른 세상으로 갔다. 두 살에 처음 경주마로 출전하여 17번의 경기에서 3번 우승했고, 3번의 준우승과 3번의 입상실적을 올린 좋은 말이었다. ‘사랑한다 루비아나’는 씨받이 말로 한국에 입양된 퇴역경주마 루비아나와 함께한 마지막 7개월의 동행 기록이다.

박찬원은 대성목장으로 입양 온 루비아나와의 첫 만남에서 전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루비아나를 통해 육체와 영혼의 생성과 소멸을 경험했다고도 밝힌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인간과 동물의 교감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루비아나의 앙상한 등으로 보여준다. 전성기 시절 건장하고 역동적인 근육이 아닌 다른 세상을 향하는 몸뚱이다. 전시실 위층 구석 좁은 벽 중앙에는 루비아나 사진 한 장이 걸려있었다. 관람자가 맨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사진이다. 긴 여정을 마친 생명을 위로하듯 영정사진처럼 빛나는 루비아나의 모습이 담겼다. 전시 공간을 채운 공기는 애틋하거나 애절하지 않았다. 친구 이상으로 교감했던 대상을 향한 애도의 마음이 사진으로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루비아나를 보면서 즉각 떠올린 건 헝가리 거장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이었다. 1899년 니체의 일화와 짐마차를 끄는 말 한 마리가 오프닝을 장식하는 영화. 비루하기 짝이 없는 말은 노쇠했고 영양상태가 나쁘고 윤기 없어 보인다. 안개 자욱한 시골길은 바람이 거세고 어둡다. 힘들고 지친 기색 역력하지만 이렇게라도 달려야 살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듯 바람을 맞으며 힘겹게 달린다. 무려 4분 19초 동안 이어지는 롱테이크를 보고 있노라면 숨막히는 답답함이 극에 달한다. 어둡고 황량한 길을 달리는 말과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처지를 등가로 놓은 충격적 체험의 연속이다.

스토리랄 것도 없이 건조하고 무심하며 잿빛 가득한 화면을 통해 거장은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 옷 입고, 물을 길어 오고, 감자를 먹고, 어둠이 내리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잠자리에 드는 행위마저 위대하다고. 변화 없는 화면과 지루한 롱테이크와 반복적 일상을 다큐멘터리처럼 전시하는 미장센이지만,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건 보편적 삶이 영화 속 인물의 일상과 크게 다를 바 없기 때문일 터다. 세기말적 서사에서조차 소외된 척박한 삶이야 말로 다수가 발 디딘 세상일 테니까.

경주마가 은퇴하면 승마용과 교배용으로 처지가 바뀌고 이마저 수명이 다하면 안락사 순서를 밟는다. 루비아나는 다행이 좋은 주인과 박찬원을 만나 생의 마지막 시간을 사진 모델로 살다 떠났다. 벨라 타르가 수평트래킹을 통해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신이 사라진 세상을 보여주려 했다면, 박찬원은 루비아나를 경유하며 두 번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인다. 루비아나는 동백꽃으로 울타리 처진 목장 아래 마당에 묻혔다. 루비아나를 만나고 온 그날 밤, ‘토리노의 말’도 내 눈앞에서 달리고 있었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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