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만든 상처의 무덤이 곧 삶…갤러리 팔조, 예진영 ‘Space-Light and Time’展
관계가 만든 상처의 무덤이 곧 삶…갤러리 팔조, 예진영 ‘Space-Light and Time’展
  • 황인옥
  • 승인 2020.07.0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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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린 연선·점토로 만든 点
평면에 배열시켜 ‘무리’ 완성
점은 자아·크기는 힘의 강약
상처 뜻하는 알루미늄 조각
수평으로 꽂아 깊이감 확보
빛 방향 따라 다양한 느낌
점·선·면으로 삶의 서사 구현
갤러리팔조예진영-2
예진영 작 ‘SPACE-Light and Time’
 
갤러리팔조예진영-2
예진영 작 ‘SPACE-Light and Time’
 
한국화의 먹의 농담을 기반으로 '관계'와 '상처'라는 주제를 다양한 재료로 표현하고 있는 예진영 작가가 자신의 갤러리 팔조 개인전에 전시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화의 먹의 농담을 기반으로 '관계'와 '상처'라는 주제를 다양한 재료로 표현하고 있는 예진영 작가가 자신의 갤러리 팔조 개인전에 전시된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연을 소재로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해가던 작가가 갑자기 망치로 연선(알루미늄 철사)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면 십중팔구 강력한 쓰나 미가 그의 일상을 휘 저었을 공산이 크다. 강렬한 계기가 없고서야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고하게 그리다 둔탁한 망치로 딱딱한 철사를 내려치는 살벌한 작업으로 변하기는 쉽지 않다.

예진영 작가가 “사회적 관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로 고통스러운 시절이 있었다. 10년 전의 일 이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다 보면 말도 많고 탈도 많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인데, 당시에는 나한테만 유독 가혹한 것 같다는 생각에 상처를 입었던 것 같아요.”

‘관계’라는 개념적 차원의 소재를 풀어낸 첫 재료는 연선이었다. 관계로부터 받은 상처로 무기력함에 빠졌을 때 작업실 한편에 존재감 없이 뒹굴던 연선을 발견하고 홀린 듯 두드렸다. 둔탁한 망치가 연선의 표면을 때릴 때마다 자신의 몸 어딘가에도 통증이 실렸다. “당시 가학적으로 내리쳤던 연선은 저 자신이었어요.”

둥근 연선을 망치로 두드리자 꽃잎 모양의 압편으로 형태가 변했다. 이 압편들을 나무틀에 스티로폼을 붙이고 한지로 배접한 평면에 꽂았다. 그러자 일렁이는 물결 형상의 반입체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의 첫 번째 반입체 작품 ‘바람-공간을 느끼다’였다. “압편으로 만든 일렁임에서 제 마음 속 상처가 흔들리는 것 같았어요. 상처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간절함이 만든 물결이었죠.”

이 시기에 점토와 면봉 작업이 병행됐다. 압편을 수직으로 꽂아 물결 형태를 만들었던 구조와 동일한 방식으로 면봉 솜이나 점토를 점(点)처럼 만들어 평면에 붙였다. 이 작품들은 점, 선, 면을 기본골격으로 형태를 확장해가는 미술의 기본요소 중에서 가장 본질에 가까운 ‘점(点)’에 대한 사유에 해당된다.

그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술수업을 했는데, 아이들에게 점의 모양에 대해 물었을 때, 하나같이 원이라고 대답했다”며 10여 년 전의 기억 속으로 훅 들어갔다. “삼각도 점이고, 사각도 점인데 대개의 사람들은 동그란 형태만 점(点)으로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사람들이 인식하는 점을 시각적으로 표현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면봉과 점토로 원을 만들기 시작했죠.”

점(点)이나 압편은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난 소재라는 공통분모로 묶여있다. 작가는 자아를 인식하는 방편으로 ‘관계’를 택했다. 관계 속의 타자를 거울삼아 자신을 인식하려 했던 것. 사실 자아에 대한 관심이 먼저였는지, 상처에 대한 아픔이 먼저였는지 선후관계를 따지기에는 애매한 지점이 없지 않지만 저변에 깔린 중심 개념이 ‘관계’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관계라는 대 주제 위에서 현실 속 재료들을 끌어들여 문제의식을 표면화하고자 했어요.”

최근 2~3년 사이에 작업에서 또 한 번의 변화가 목도된다. 흰색만 바라보던 태도에서 벗어나, 블루나 그린 등의 원색들을 서사의 중심에 우뚝 세웠다. 재료도 알루미늄 판이나 점토 등으로 다변화했다. “상처를 바라보는 저의 인식 수준이 변하면서 작업도 다양한 변화가 시도 됐죠.”

최근 개막한 갤러리 팔조에 걸린 변화된 작품은 두 종류다. 첫 번째 작품은 점토를 접착제와 물감을 섞어 둥글게 굳힌 점 모양의 작은 형상을 시침핀 머리에 고정하고, 그것들을 무리지어 꽂은 작품이다. 하나의 평면에 수십 개의 무리가 구축되어 있다.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수없이 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죠. 그 많은 관계들을 수십 개의 무리로 표현해 보았어요.”

하나의 무리는 수십 개의 점들로 구성하고 있다. 이때 점의 크기는 단계적이다. 가장 큰 것부터 아주 작은 점까지 다양하다. 작가가 “점의 크기는 힘의 강약에 대한 은유”라고 했다. “힘의 역학 관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현실 속 무리의 속성을 크고 작은 점들의 조합으로 드러내고 싶었어요.”

두 번째 작품은 알루미늄 판을 사용한 작업이다. 알루미늄 판을 잘게 자르고 망치로 두드린 후 뒷면에 색을 칠해 스티로폼으로 구축한 평면에 꽂는다. 알루미늄 조각의 앞면은 두드려서 상처를 낸다. 감정의 충돌로 생긴 상흔을 두드린 상처로 표현했다. 상처 난 조각들이 평면에 자리를 잡으면 상처 난 표면이 이웃한 표면에 비치게 된다. 이 수많은 조각들에서 비침에서 마음과 마음, 상처와 상처의 소통을 감지한다.

그가 “알루미늄 조각은 우리 마음의 조각”이라고 했다. “우리 마음의 조각들이 관계 속에서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것에 대한이야기에요. 제게는 그것이 아름답게 보였고, 상처의 조각들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되었죠.”

알루미늄 조각들의 운집은 점(点)의 결집과는 결이 다르다. 빛의 변화에 따라 드러나고 감춰지는 부분들도 달라진다. 시간이 흐르고 빛의 변화에 따라 오른쪽이 부각되기도 하고, 왼쪽이 도드라지기도 한다. 작가가 “빛이 없으면 색을 볼 수 없다”며 “빛을 통해 감정이 어떤 형태로 다양하게 발산되는지에 대한 표현법”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빛과 시간을 끄집어 낸 것은 희망과 맞물려요, 빛이 없다면 제 마음이 어둠속에 갇혔겠지만 빛이 있어 어둠이 걷힌 것이죠.”

최근 몇 년 사이에 관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도 변했다.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는데 급급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한껏 수용하는 편이다.

“연선을 망치로 두드리거나 면봉을 붙이는 등의 몸 작업을 하면서 상처들을 밖으로 토해낸 것 같아요. 그러면서 상처라는 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의 문제라는 인식도 하게 됐죠.”

면봉이나 연선 작업들이 ‘개인 차원’에 국한되었다면, 알루미늄 판이나 점토로 만든 최근 작품들은 보편 차원으로 격상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형상을 구축하는 방식에서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조각을 꽂는 방식이 수직에서 수평으로 변했다. 수평에 의해 생겨난 그림자는 수직으로 꽂을 때와는 다른 깊이감을 선사했다.

“수평으로 꽂고 여백도 두면서 그림자가 여실히 드러났어요. 수평으로 꽂힌 평상 밑에 그림자가 베이스로 갈리면서 형상의 중첩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졌어요. 깊이감이었죠.”

갤러리 팔조에 걸린 작품들에서 문제의식을 풀어가는 작가의 수준이 읽혔다. 그는 영리하게도 하나의 관념을 개념적으로 풀면서, 거시적인 차원과 미시적인 차원을 동시에 구사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주제는 깊이를 더한다. “점토 작품이 우리의 삶 속에서의 관계가 가지는 위치에 대한 이야기라면, 알루미늄 작업은 하나의 관계를 확대해 그 속에서 충돌과 반사에 의해 발산되는 감정들의 흐름을 포착한 겁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예를 시작했고, 대학까지 논스톱으로 한국화만 했다. ‘관계’와 ‘상처’라는 관념을 붓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몸 작업으로 변화했지만, 그의 작품에는 한국화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관계를 형상화한 모든 작품들에서 물결 같은 일렁임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먹의 농담으로부터 왔다. 그가 “먹의 강 약 느낌을 형상화 시켰다”고 했다.

“주위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재료로 붓 대신 몸을 써서 반 입체를 구축했지만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보고 동양의 산수화 같다는 이야기를 해요.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개체들을 꽂아 무리를 만드는 과정에 한국화의 농담 법을 차용한 것 같아요.”

작품 제목을 동일하게 ‘공간-빛과 시간(Space-Light and Time)’이라고 지을 만큼 작가에게 캔버스는 삶의 공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공간에 점과 면은 선을 구축하며 삶의 서사를 이입한다. 현상의 재료와 몸의 행위로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철학을 체계화하고 있다. 관계 속의 개인, 그로부터 파생된 상처라는 개인차원에서 시작해 조직과 세계라는 보편 차원으로 확장하며 스토리 구조를 단단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관계’와 ‘상처’라는 주제를 개념이라는 현대미술의 표현법으로 풀어내면서도 한국화의 ‘먹의 농담’을 적극 활용하며 동서양을 아우르는 예진영의 예술 미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갤러리 팔조 전시는 내달 16일까지. 054-373-6802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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