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층 새댁의 손편지
위층 새댁의 손편지
  • 승인 2020.11.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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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피어리 결혼정보회사
교육학 박사
가을의 끝자락에 접어들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나 보다. 단풍 든 가을산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다.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기온에 가을도 서서히 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계절의 시계바퀴는 어김없이 돌아간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데 365일이 걸린다. 지구는 초속 30킬로미터의 속도로 공전한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지구가 몇 바퀴를 공전하면 우리도 지구여행을 끝마칠까. 해마다 한 해의 마무리를 하면서 느끼는 인생무상이다.

언제부터인가 아파트 고층에 사는 것이 싫어졌다. 멀리 도심 전체가 보이는 광대한 풍경보다는 창밖으로 작은 하천이 흐르고 사람들의 도란거리는 말소리, 표정을 볼 수 있는 전망에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4~5층 정도의 아파트에 끌렸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살던 집을 팔고 강둑을 따라 새벽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다. 5년 동안 정들었던 새 아파트라 이사 준비를 하면서 마음이 내내 뒤숭숭 하였다. 오랫동안 발이 되어준 자동차를 팔고 새차를 구입할 때 왠지 헌차에게 미안했던 생각이 났다. 아끼던 물건에 사랑을 쏟다가 새로운 물건에 마음이 가는 속내가 들켜버려서 더 미안했는지도 모른다.

한 해가 또 간다는 부담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나 보다. 오늘따라 피곤해서 축 늘어져 있는데 카톡 알림음이 궁금증을 유발했다. 18층에 사는 아이 둘 있는 예쁜 새댁의 메시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상냥하게 말을 걸며 막내가 쿵쿵거리며 소음을 일으켜 죄송하다던 새댁이다. 가끔씩 아이들이 위층에서 우르르 뛰는 소리에 잠을 설친 적도 있지만,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의 건강한 자유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새댁의 남편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이사 가신다면서요, 저희 집사람이 얼마나 섭섭해 하는지 모릅니다.” 메시지를 보는 순간 새댁 남편의 말이 떠올랐다. 갖다 드릴 게 있어서 몇 번이나 아래층에 내려갔는데 안 계셔서 이사 간 줄 알고 섭섭했다며, 내일 아침에 방문하겠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새댁은 유치원에 등교할 막내를 데리고 환한 미소로 나를 찾았다. 선물 봉투를 내밀면서 위층에서 많이 시끄러웠을 건데 싫은 내색 한번 안 해서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결혼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데 저희 아이들도 나중에 선생님이 꼭 배필을 찾아주면 좋겠다는 듣기 좋은 말도 했다. 100세 시대에 평생 일할 생각이지만, 아래층 아이들 장가보낼 때까지 오래도록 일해야 되겠다며 함께 웃었다. 새댁은 갑자기 내 손을 꼭 잡으며 ”선생님과 인연 안 놓을래요”라고 했다. 새댁이 주고 간 봉투에는 텀블러와 하얀 부엉이 인형이랑 손편지가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18층에 아들 둘 둔 애기 엄마예요, 선생님 이사 가신다는 얘기 듣고 감사하다는 표현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해요, 그동안 너무 감사드리고 죄송했어요. 에너지 넘치는 막내 때문에 많이 시끄러웠을건데 싫은 내색 한번 안 하시고 애들이 다 그렇지 하실 때는 천사가 선생님 모습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중략” A4 용지에 깨알같이 정성들여 쓴 손편지에 막내가 그린 그림까지 덧붙였다. 오랜만에 받아본 감동의 편지였다.

살맛 나는 세상이다. 세상인심이 각박해도 우리의 이웃에는 이사 가는 이웃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운 새댁 같은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세월이 흘러 꼬맹이들은 건장한 청년으로 잘 자랄 것이다. 분명 엄마같이 아름다운 신부를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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