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박아두다
처박아두다
  • 승인 2021.02.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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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아
볕이 쨍하고 바람도 선들거려 빨래가 잘 마르겠다

깊이 처박아두었던 것들,

처박아두고 까맣게 잊어버린 것들 끄집어내야지

끄집어내어 바삭거리는 볕 아래 널어야지

처박힌 것들은 어둑한 구석에 있다

어딘지 모를 엉뚱한 데서 깜빡 잊고 넘어간 것들

숨긴 것은 아닌데도 숨어 있다

처박힌 것들은

창이 그립지 않은지

차라리 어둠에 익숙했는지

빛이 두렵다고 한다

해 아래 나서기만 하면 어지럼증에 시달린다

나도 그동안 처박혔던 목숨인지 모르겠다

망각에 친근하고

따돌림에도 익숙했으련만

어둑어둑한 골목에서 버섯 같은 죽지를 펴고

내일 아침에는 떠나리라, 떠나리라 안달을 한다

처박힌 날들의 오욕,

눌리고 밀렸던 열망으로

나도 빨랫줄에 부끄러이 널리고 싶다

이런 날엔 빨래가 잘 마를 것이다

◇이향아=『현대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오른 후,『별들은 강으로 갔다』등 시집 23권.『불씨』등 16권의 수필집,『창작의 아름다움』등 8권의 문학이론서를 펴냄. 시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문학상, 아시아기독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을 수상함.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고문, 한국문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문학의 집· 서울> 이사. 호남대학교 명예교수.

<해설> 화창한 날에는 밀린 빨래나 청소를 하고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는 감정일 것이다. 어딘지 모를 깊숙한 곳에 처박혀있는 것들을 꺼내어 깨끗이 빨면 억눌렸던 가슴 속까지도 깨끗해지는 쾌감 때문이리라. ‘나’라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사회 구성원의 이름으로 억눌려 살다 보면 말이다. -정광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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