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그 한 사람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백정우의 줌인아웃]그 한 사람이 되어주시겠습니까?
  • 백정우
  • 승인 2021.04.01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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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내가죽던날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소녀가 사라졌다. 이름은 세진. 범죄자인 아빠가 죽자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따라 외딴 섬에 홀로 머물며 경찰의 보호관찰을 받던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건을 종결시키기 위해 정직 중인 형사 현수가 파견된다. 태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날이었다.

보호를 맡은 젊은 경찰은 불편했을 것이다. 여자아이와 한 공간에 머무르며 주시하고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 주민들의 시선과 동료의 부당한 의심이, 아이의 눈빛과 친밀한 반응이 부담됐을지도 모른다. 후배 경찰은 선배의 선의를 의심하는 것이 미안했을 것이고, 마을주민은 서울에서 홀로 내려온 계집아이에게, 마음이 성치 않다는 소녀에게, 종종 잔망한 그 아이에게 과도한 관심을 줘봐야 피차 득 될 게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선의가 의심 받을 짓으로 곡해당하는 상황을 겁냈을지도 모른다. 와중에 감방에 있는 오빠는 재산과 보험금에만 관심이 있었고, 계모는 자기 신상이 먼저였다. 누구도 아이를 진심으로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어 있는 꿈을 매일 꾸면서도 안간힘으로 살아내는 현수는 스스로를 지키려 애쓰던 세진의 자살 사건을 조사하면서 고립무원의 삶을 돌아본다. CCTV를 부수며 성난 얼굴로 바라보던 아이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죽으려고 발버둥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을 친 거라고 말이다. 아이와 밀접한 관련자들을 만나지만, 누구도 아이의 죽음에 의심을 품지 않는 상황. 아이가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태도이다. 급기야 터진 현수의 절규와 탄식.

“그 애는 그렇게 죽을 애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 한 명이라도 만나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 한 명이 없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은 말한다. ‘내게 집중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죽지 않는다’고. 그래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떤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힘든 거냐, 고. 현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어떤 상황에서도 손을 놓지 않고 곁을 지킨 친구였다. 연락이 안 되면 안절부절 못하고, 밥은 먹고 잠은 제대로 자는지를 집요하게 물으면서 시시콜콜 잔소리 퍼붓는 친구 말이다.

온 동네 사람들과 말을 섞고 정을 나누며 살던 시절, 동네마다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 가게의 가족과 속사정을 모두가 알았다. 아니 서로가 서로를 알았다. 구멍가게가 슈퍼로 바뀌더니 마트를 거쳐 이젠 24시간 편의점이 그 자리를 채웠다. 누구도 편의점 주인이나 아르바이트생에 관해 알지 못한다. 아예 관심 밖이다(혹시 관심을 가진다면 강도예비음모로 의심 받을지도 모른다). 2인칭이던 구멍가게 아저씨와 아이들은 3인칭 아르바이트생으로 바뀌었다. 친밀한 당신에서 숱한 누군가로 대치된 것이다. 나와 타인 사이에 자리했던 ‘우리’는 사라진지 오래다. E. 레비나스의 ‘타자의 윤리학’이 상정한 3인칭의 죽음을 2인칭으로 전환하라는 요청이 더욱 간절해진 까닭이다.

현수가 소녀에게 ‘한 사람’이 되어 주기로 결심한 이유는 자신이 친구에게서 받은 치유의 힘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일 터다. 그리하면 마침내! 씩씩하게 살아가는 소녀를 만날 수도 있다는 것. 2인칭 소멸의 시대에 박지완 감독은 ‘내가 죽던 날’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에게 집중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까, 당신도 그 한 사람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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