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구의회 최우영 의원 “6·25 당시 최초 대구 육군훈련소 알리자”
북구의회 최우영 의원 “6·25 당시 최초 대구 육군훈련소 알리자”
  • 한지연
  • 승인 2021.05.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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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6천명까지 수용됐지만
안정적 인력 보충 위해 이전
산격동에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작은 표석·안내판 설치해야”
카카오톡-인물
최우영 의원
호국보훈의 달 6월을 앞두고 6·25전쟁 당시 최초의 육군 제1훈련소인 ‘대구훈련소’를 기억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구 북구의회 최우영(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구훈련소를 널리 알리기 위한 조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30일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사적지 안내 홈페이지를 살펴본 결과 ‘대구훈련소 터’는 6·25전쟁 직후 대한민국 국방부에 대구에 제1훈련소를 설치해 신병을 교육한 곳이다. 당시 육군 제1훈련소라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끔 멸실된 상태로 현재는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대구 북구 내 ‘육군 제1훈련소 터’와 낙동강 방어선이 편성될 무렵 국군의 전방 지역 전투부대에 병력과 물자 수송을 위해 사용됐던 장소인 ‘대구역 병력집결지’는 국가 수호사적지로 정해진 바 있다.

국방부는 6·25전쟁 초 각 지역 방위임무와 병력확보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목적으로 지역별로 편성관구사령부를 설치하고 신병보충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북도 등 4개 지역에 편성관구사령부를, 대구에 제1훈련소를 설치했다. 제2훈련소는 부산, 제3훈련소는 구포 등 전국 각지에 설치됐다.

대구훈련소는 1일 1천명의 신병을 배출했으며, 입소하는 훈련병은 거의 가두모집이나 강제 징·소집된 인원인 것으로 전해진다. 수용 병력이 5천~6천 명으로 1~2주간의 훈련을 실시했다. 이후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병력 보충의 필요성에 따라 1951년 1월 제주도 모슬포로 제1훈련소가 옮겨져 가게 됐다.

전쟁 초기 수개월간의 산격동 훈련소는 전장에 배치할 신병 교육이 다급한 한편, 훈련 등에 필요한 각종 시설은 매우 열악했다. 숙소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천막 속에 가마니를 깔고 내무생활을 했고, 새벽녘 거센 바람이 불면 훈련병들이 잠을 자다가도 일어나 천막이 날아가지 않도록 잡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최우영 북구의원은 “집행부인 북구청이 우리 지역 국가수호사적지에 대해 조사 후 지금의 경대교 옆이라 알려진 육군 훈련소 장소와 대구역 병력집결지에 작은 표석 돌과 안내판이라도 설치해야 한다”라면서 “70년 전 참전이 곧 전사일 수밖에 없는 어려운 시기에 젊은이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한 나선 국가수호 사적지가 우리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지연기자 jiyeon6@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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