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철들다
장마, 철들다
  • 승인 2021.07.04 20: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현숙 시인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던 이해리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비가 오려나 보다. 마치 구름은 반죽한 밀가루를 공중에 띄워놓은 것 같다. 이런 날, 수제비 같은 구름 속에서 아버지가 하얗게 미소를 지으며 손짓하는 것만 같다.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인 하지(夏至)는 그리움도 가장 높고 긴 날이다. 아버지는 하지감자를 넣은 감자수제비를 무척 좋아하셨다. 하지는 24절기 중 열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다. 농경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절기로서의 존재감이 매우 컸지만, 지금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 보인다. 장마가 시작되는 무렵이면 다가올 무더위에 대비해 수분을 적당히 머금고 단맛과 포슬포슬한 식감이 좋은 하지감자를 넣은 수제비야 말로 가장 제격인 제철 음식이 아닐까.
옛적, 먹을 게 부족하던 시기에 수제비는 소중한 한 끼 식사였다. 먹거리가 흔해지면서 주식에서 간식으로, 추억의 자리를 내어 주었다. 하지만 일찍이 할머니를 여윈 당신 삶의 허기를 견디게 해주던 음식이었기에 수제비 한 그릇 드실 때마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도려낼수록 자라는 감자 싹에든 독처럼, 불쑥불쑥 돋아났을 테다.
후드득 비가 떨어지면 하늘을 쳐다보던 아버지는 언제나 맏딸인 나를 불렀다. 당신의 입맛을 가장 잘 알아주는 자식이라 여겼던 탓이었을까. '엄마가 더 맛있게 잘 끓일 텐데 왜 매번 나만 시키냐'며 투덜투덜하면서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수제비를 뜨곤 했다.
"큰딸, 아부지 수제비 한 그릇 끓여봐라"
아버지를 감동하게 하는 나만의 요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커다란 양푼에 밀가루를 넣고 소금으로 간을 한다.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숟가락으로 휘휘 젓는다. 되지도 묽지도 않게 적당히 어우러지면 비닐봉지에 담아 밀봉한 후 냉장고에 넣고 한 시간 정도 숙성시킨다. 자연스레 어우러진 후 꺼내 반죽을 하면 쫀득쫀득하게 차진 맛이 일품이다. 봉지 안에서 반죽이 숙성되는 동안 육수를 끓인다. 큼직한 냄비에 속을 제거한 멸치와 다시마, 무, 양파 등등 갖가지 채소를 넣고 오랜 시간 뭉근히 끓인 후 건더기를 건져낸다.
말간 국물에 분이 풀풀 나는 감자를 충충 썰어 넣는다. 감자가 살포시 익기 시작하면 반죽을 꺼내어 손으로 굴려 가며 알뜰살뜰 치댄다. 행복하게 웃을 때의 입 크기만 하게 반죽을 떼어 한 장, 한 장 얇게 펴서 사뿐사뿐 떼어 넣는다. 모든 준비를 잘했다 하더라도 이때 이르러 정신을 놓으면 그간의 정성이 수포가 되는 수도 있다.
마지막 화룡점정은 계란지단이다.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한 후 보풀이 일어나지 않게 구운 꾸미를 가지런히 올린다. 먹어주는 사람에 대한 사랑과 특별함을 전하기 위함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대접 거뜬히 비운 아버지는 그제야 맛있다는 말 대신
"딸내미, 수제비를 손으로 뗐나 발로 뗐나?"
하시고는 아버지의 남모를 슬픔이 눈 녹듯 사라지셨는지 껄껄 웃으시곤 했다. 어쩌면 수제비는 아버지와 나의 소통의 맛이요, 힘을 돋우는 충전의 맛이었으리라.
어느 날 문득, 전화도 없이 친정엄마가 찾아왔다. 비를 데리고 우산을 쓰고 왔다. 신발을 벗으며 아직 방안에서 나오지도 못한 나를 향해 "큰딸, 발로 떼 넣은 수제비가 먹고 싶은데 우짜꼬" 하신다. 가까이 살면서도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지 못했는데, 갑자기 수제비라니. 통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 없었는데…. 장마철이면 엄마도 감자수제비를 좋아하시던 그때의 아버지가 떠올랐는지, 아니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었다.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김훈 작가의 '라면을 끓이며' 중의 한 대목이다. 음식은 봉인되었던 추억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을 지녔다. 비가 오는 날,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좋은 날, 그리움으로 우려낸 육수에다 한 장 한 장 추억의 수제비를 띄우는 삶이 한바탕 소나기 지나간 삶처럼 시원하기를 바라본다. 웃비가 걷히니 비탈진 산허리, 개망초꽃이 흐드러지게 핀 언덕길을 힘차게 달려가는 아버지가 잠시 보였다가 가뭇없이 사라진다.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