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스페이스 루모스, 김병태 사진전
아트스페이스 루모스, 김병태 사진전
  • 황인옥
  • 승인 2021.12.0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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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 듯 추상인 듯 모호한 분위기
렌즈 버리고 셔터만 눌러 촬영 시도
노이즈로 찬 화면 ‘텅 빈 충만’ 자체
보이지 않는 대지 기운 느껴지는 듯
김병태작Breath연작
김병태 작 ‘Breath’ 연작

자연만큼 완전무결하고 위대한 스승이 또 있을까? 사진작가 김병태 역시 최고의 스승은 자연이었다. 그에게 자연은 인간의 탐욕에 제동을 거는 유일한 존재이자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가장 강렬한 선지자로 다가왔다.

그가 자연에 이처럼 진심이 되기까지는 아프리카의 대평원이 있었다. 28년 전인 1993년에 무역업을 하겠다고 아프리카 나이로비에 정착한 이후 틈만 나면 케냐의 대평원을 찾아 사진을 찍으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에 매료됐다.

김병태 개인전이 최근 아트스페이스 루모스에서 개막했다. 전시에는 케냐의 광활한 대자연과 케냐 사람들을 촬영한 사진 50여점이 모였다. 전시작들은 분명 사진인데, 회화성이 짙었다. 사진인 듯, 색면 추상인 듯 경계가 모호했다. 아프리카의 광활한 자연을 작가 특유의 색채와 미감으로 포착한 결과였다.

그가 거주하는 나이로비에서 대평원으로 이동하는 시간은 족히 7시간 이상 걸린다. 그 먼 거리를 틈만 나면 달렸다. 아프리카의 원초적인 자연 앞에서 가슴이 뛰지 않는다면 사진작가로서 직무유기였을 것이다. 나이로비에 정착하고 10년간은 그도 여느 작가들처럼 아프리카의 야생 동물에 매료됐다. 당시 그는 줌을 한껏 당겨 표정이 살아있는 얼굴이나 일상을 살아가는 동물들을 찍었다.

2014년 무렵부터 아프리카의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균열이 찾아왔다. 중심 피사체였던 동물의 자리에 방대한 대평원이 자리를 꿰찬 것. 10여년간 집중했던 동물들을 광각으로 밀어내고, 탁 트인 아프리카 대평원의 광활함을 한껏 끌어들였다. 주로 일출이나 일몰 직전 또는 직후의 검은 언덕을 중심으로 대평원을 하나의 화면에 포착했다.

대평원을 피사체로 한 첫 작품은 ‘일깨움(Awakening)’ 연작이다. 결이 다른 두 개의 검은 어둠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한줄기 빛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어둠이 내려앉은 언덕은 그대로 두고, 허공은 인위적으로 가리는 방식으로 어둡게 처리해 결이 다른 두 개의 암흑이 머리를 맞대도록 했다. 두 개의 면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빛은 그가 새로운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일종의 암시였다.

인류의 발상지인 아프리카의 대평원은 물질의 세계다. 작가는 ‘일깨움’ 연작에서 물질세계를 정신 세계로 치환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사진에 사유가 시작된 것. “어둠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는 첫 시원에 대한 자각을 아프리카의 자연에서 새삼 깨닫”게 되면서 아프리카의 자연은 더 이상 그에게 물질 차원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때가 그의 사진이 변곡점을 지나는 시점이었다.

작품 ‘유희’ 연작은 사진의 고정관념을 깨는 촬영 기법과 한층 더 짙어진 사유가 만난 결정체다. “자연의 어떤 부분이 나를 매료시키는가?”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감도를 최고조로 높이고 렌즈를 과감하게 제거한 후 카메라 바디만으로 촬영해 얻은 결과다. 렌즈를 버리자 마치 붓으로 수많은 점을 찍은 것 같은 회화적인 화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이즈에 의한 효과였지만, 그에게는 가없는 사유의 공간을 획득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가 노이즈로 얻은 공간을 “텅 빈 충만”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암흑 속 대평원에는 낮에 보았던 세상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비록 암흑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가득 차 있다는 논리였다.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나가, 보이는 세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기운까지 텅 빈 충만 속에 포섭하고자 했다.

“대평원에 존재하는 생명체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공기나 기운까지 담아내려 했다.”

가장 근작은 ‘숨(breath)’연작이다. 빛에 의해 시시각각 표정이 달라지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색들 중에서 작가의 감수성에 부합하는 색이 대평원에 내려앉을 때 촬영한 작품이다. 흔히 예술가들은 황금분할에 열광하지만 작가는 ‘숨’ 연작에서 황금비율 대신 정비례를 채택했다. 하늘과 땅의 비율을 동일하게 설정한 것. 이러한 분할은 그가 아프리카의 자연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자연의 무심함과 공허함을 정비례로 표현했다.”

자연은 주어지는 대로 수용한다. 그 무심함에 단 1%의 욕망도 개입되지 않는다. 때가 되면 허기를 채우고, 자신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간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다른 존재를 간섭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이 거듭되면서 작가도 자연의 ‘본성을 수용하는 태도’에 조금씩 동화되어 갔다. 그 깨달음들이 ‘숨’ 연작으로 기술됐다.

작품 ‘일깨움’이나 ‘숨’, ‘유희’ 연작에 동물들의 존재는 도드라지지 않는다. 작품 가까이 다가가야 겨우 보일 정도로 미미하게 포착된다. 이같은 깨알같은 존재감은 밀림의 주인인 동물 역시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대한 은유다.

동물도 자연의 일부라는 깨달음은 인간에게로 확장됐다. 그가 이에 대해 “아프리카의 자연에서 잊고 있던 인간의 위치를 새삼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아프리카에서 삶과 죽음에 초연한 자연을 보았다. 인간만이 욕망에 집착한다는 깨달음을 하자 내 삶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더불어 비우는 법도 터득하게 됐다.”

아프리카의 자연을 주된 피사체로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도 그의 관심사다. 하지만 익숙하게 봐왔던 가난한 나라 사람 특유의 모습은 배제한다. 평범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피사체로 선정되지만, 카메라 앞에서 순박하거나 일그러지는 등의 감정상태를 드러내지 않을 것을 주문한다. 뒷 배경에 검은 천을 설치하고, 목까지 감싼 검정옷을 입히고, 눈을 감긴 채 촬영한다. 이렇게 촬영된 사진은 정체성이 명징한 케냐 사람이 아닌 보편 인간으로 거듭난다.

무심하게 바라본 아프리카 대평원과 카메라 앞에 선 케냐 사람들은 주제적인 측면에서 동일하다. ‘시원’이나 ‘자각’이라는 주제를 서로 다른 피사체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들이 가난하다거나 고도로 문명화되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케냐가 가진 시원이나 자각으로서의 순수에 집중하려 했다.”

아프리카 대평원을 통해 중견 사진 작가로 성장했지만 내면적인 깨달음도 적다고 말할 수 없다. 순수한 아프리카의 자연에서 그의 사진과 사유는 함께 성장했다. 그 결과 1988년 사진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 케냐에서 작업한 사진들로 한국, 케냐, 미국, 일본 등지에서 20여 차례 개인전을 열며 존재감을 알렸다. 김병태의 ‘이토록 빈, 숨을 고르다’전은 26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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